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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회복이 질병의 이상적인 결말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어떤 이들은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만일 회복이 이상적으로 여겨진다면 계속 만성으로 남아 있는 질병이나 죽음으로 결말나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어떻게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답은 회복보다는 ‘새롭게 되기’에 초점을 맞추는 일인 듯싶다. 계속 아프다 해도,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질병 안에는 새롭게 될 기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9-10쪽)
회복이란 무엇인가? 질병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가령 위염을 앓다 치료 받고 염증이 사라진 경우처럼 ‘더는 아무 문제없는’ 상태를 회복이라 한다면 대체 얼마만큼의 병에서 그런 회복이 가능한가?
회복이라는 말은 분명한 소원을 품고 있다. 그 소원이 대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 같은 것이라 문제다. 예컨대 생애 초기 엄마를 잃은 아기가 자라나 청소년기에 우울장애를 앓는다 하자. 우울장애를 낳은 그 상실을 회복시키는 치료가 있는가?
당연히 없다. 절대로 없다. 이 경우 무엇을 "이상적인 결말"로 삼을까? 그러니까, “계속 만성으로 남아 있는 질병이나 죽음으로 결말나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어떻게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질병이 계속되고, 심지어 그 때문에 죽어가는 상황에서 대체 어찌 하면 “새롭게 되기”가 가능한가?
새롭게 되기는 바뀌기다. 바뀌려면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려야 한다. 있는 그대로 현실이란 순수사실의 집합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질병에 처한 자신의 삶을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해석하고 평가하지 않은 채 ‘망연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볼’ 때 보이는 현실이다. ‘전경을 품고 각각의 풍경을 지나 걸어감으로써 아픔을 대할 때에만 얻어지는 각성’된 현실이다. 이렇게 각성된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 진리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부하기까지 하다. 이 진부한 진리가 내 삶의 진실이 되는 게 관건이다. 관건이 관건일 수밖에 없는 것은 “계속 아프다 해도,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이 각성이 정녕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아프다 해도, 아니 계속 아프기 때문에 새롭게 되어 간다.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아니 심지어 죽어가기 때문에 새롭게 되어 간다. 이 각성이 절망을 “기회”로 전복시키며 내 삶을 숭고로 이끈다. 숭고는 눈물과 익살을 양손에 잡고 장엄의 길을 걷는다. 늘 아파서 나날이 죽어가서 내내 새롭다.
현재의 질병 상태에서 놓여나지 못한 채, 한평생 살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아뜩함으로 주저앉곤 하는 한 청년이 있다. 정작 아뜩함을 느껴야 할 것은 회복의 신화에 매달려 질병을 증오하기만 하는 유태幼態보존적neotenic 자기애다. 여기를 짚고 일어나지 않는 한, 그의 삶에는 새로움의 빛이 영영 찾아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