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은 온통 아픈 생각뿐이기 십상이다. 통증이 심하면 더욱 그렇다. 병이 중할수록 더욱 그렇다. 아픈 생각에 빠져들고 만다. 병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병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병의 악화에 에너지를 보탤까. 가볍게 답할 일 아니다. 반대의 경우를 살펴보자. 낫는 생각에 몰두하는 것은 어떤가. 병의 호전에 에너지를 보탤까. 가볍게 답할 일 아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이 문제에 가볍게, 그리고 쉽게 답하는 여러 이야기를 수 없이 들어왔다. 가장 유서 깊은 말은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다. 출처가 어딘지 잘 모르지만 불가에는 이미 진리처럼 각인된 말이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모르지 않는다. 불가 수행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 말은 개소리가 된다. 암에 걸리는 것도 마음 지음이고 암에서 놓여나는 것도 마음 지음이란 말은 얼마나 가볍고 쉬운 것인가. 그 다음 긍정주의. 모름지기 일체유심소조의 세속 판 현대 버전 쯤 되겠다. 여전히 어느 제국에서 왕 노릇하거니와 이 또한 개소리임이 분명하다.


이런 말도 들어왔다. 병은 그저 내게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다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병이 어떻게 들어왔든 의학적 치료로 낫게 하면 그만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결곡한 합리성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이 역시 개소리다.


이 개소리들의 촐싹거림은 질병 자체를 질병 앓는 사람에게서 떼어내어 사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질병은 사물이 아니다. 앓는 사람의 삶, 그 살아 움직이는 과정의 일부다. 사람에게서도 삶에게서도 분리할 수 없는 사건이며 대부분 물적 근거와 영역을 지닌 실재다. 그런 실재에 걸맞은 대우는 단연 화두 삼기다. 분명히 하자. 화두 들기가 아니다. 드는 것은 남성가부장 선객이 하는 짓이다. 우리는 화두를 선의 방편 사물로 들지 않는다. 화두를 인연으로 받아들인다. 화두와 전 인격으로 관계 맺는다. 삼아지는 화두에는 우리 인생 전체가 연루된다.


녹색의학은 질병을 화두 삼는다. 백색의학이 질병을 ‘처치’ 대상 사물로 폄훼한 역사를 통렬히 반성한다. 질병은 앓는 사람이 잘못 해서 들고 들어온 몹쓸 물건이 아님을 선언한다. 질병은 마음만 먹으면 후루룩 삼켜버릴 수 있는 라면 같은 것이 아님을 명토 박는다. 녹색의학은 질병과도 질병 앓는 사람과도 평등하게 상호소통하기 위해 작고 적게 배어드는 마음小少沁心이며 그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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