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학이 꺼낸 걷기 이야기의 핵심에 놓여 있으면서, 그 흐름 전반을 관통하는 종자논리, 그것이 형식 논리일 수는 없다. 걷기 동작 그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 걷기 이야기의 종자논리는 A이기도 하고 non A이기도 한 것, A도 아니고 non A도 아닌 것을 인정하는 다치多値 논리다. 다치 논리는 무한한 비대칭의 대칭을 품는다. 비대칭의 대칭은 평등한 상호 소통을 전제한다. 상호 소통은 녹색의학과 백색의학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백색의학이 형식 논리에 터한 이종의학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종의학이 모든 증상을 병으로 오인하고, 모든 병을 적, 그러니까 non A로 오인해서 무조건 때려잡는다는 사실 또한 논리적 필연으로 알고 있다. 이런 백색의학은 구조상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안을 수밖에 없다.


첫째, <18. 녹색 면역>에서 이미 상론했듯 자기면역 이론 구조가 취약하다. 이론이 취약하니 치료 구조도 그러하다. 역설 이론을 세울 수 없는데 어떻게 역설 치료가 가능하겠는가. 그러니까 백색의학은, 예컨대 혈소판 감소가 자기면역으로 발생하면 비장을 제거한다,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 이는 물론 치료가 아니다. 쌍방향 면역 조절이란 개념의 방 자체가 없으므로 양의사도 그들에게 치료(?)받는 환자도 속수무책이다. 아니, 무엇보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 녹색의학은 쌍방향 면역 조절 이론을 알고 있으며 치료 또한 가능하다. 이는 매우 중대한 차이다.


둘째, 상호소통이 그 자체로 의학이라는 인식 구조가 누락되어 있다. 백색의학은 세계를 다만 질량과 에너지로 인식하고 만다. 질량은 구조, 에너지는 물리화학적 기능이다. 이 둘에 문제가 생긴 것이 질병이므로, 구조를 조정하고 기능을 개선하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질병과 질병을 앓는 인간을 분리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모든 질병은 그 질병을 앓는 사람의 삶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삶의 문제를 소거할 수는 없다. 삶의 문제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곡절과 의미를 담은 소식이다. 질병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는 그 자체가 의학이라는 진실을 백색의학은 모른다. 그 작은 일부를 플라시보라는 이름으로 왜곡할 뿐이다. 백색의사들은 질병 자체에 대한 정보조차 소상히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의 아픈 삶에 일절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의학 내러티브의 근원 주체인 아픈 사람을 도리어 철저히 소외시킨다. 이는 다만 의학적 구조의 오류가 아니다. 범죄다. 녹색의학은 질병과도 질병 앓는 사람과도 소통한다. 질병 자체로 가치로우며, 질병 앓는 사람 자체도 가치 롭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이는 절대적인 차이다.


백색의학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알 수 없다. 백색문명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이런 백색의학에서 질병과 질병 앓는 사람을 구해내는 단 하나의 길은 저들을 아예 입에 담지 않고 고요히 녹색의학의 네트워킹을 진행하는 것뿐일는지 모른다. 입에 담을수록 사악한 구조는 끈질긴 생명력을 더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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