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직립 보행할 수 있도록 진화하면서 뇌가 커져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미성숙기가 오래토록 지속된다. 윤리 뇌가 다 자라는 것을 마지막이라고 보면 여성은 25년가량, 남성은 30년가량 자라야 한다. 전인격적 성숙까지 고려할 때, 사실 인간의 대부분은 평생토록 다 자라지 못하고 살다 죽는다. 직립보행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축복의 이면이다. 비대칭의 대칭이란 진리는 여기서도 예외를 허하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나 자라가는 과정은 단계적인 몸짓 변화로 이루어진다. 몸짓이야말로 존재론이며 근원의학이다. 소미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넘기고 큰 몸짓 이야기만 한다. 아기가 가장 먼저 하는 몸짓은 뒤집기다. 뒤집기는 눕혀진 상태에서 엎드린 상태로 바꾸는 몸짓이다. 이 몸짓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스스로 만드는 최초 행동이다. 배가 위로 향해 있으며 움직이지 못하는, 그러니까 죽어가는 물고기와 움직이지는 않지만 배를 아래로 향하고 잠든 물고기를 비교하면 그 이치를 금방 알 수 있다.


뒤집은 다음 아기가 하는 몸짓은 몸을 좌우로 흔들어 전진하는 배밀이다. 이것은 명백히 물고기, 그러니까 어류의 생명 운동이다. 그 다음에는 손발을 쓰면서 진행되는 엎드려 기기다. 배가 여전히 땅에 닿아 있는 양서류 단계부터 시작해 파충류 단계를 거쳐서 이윽고 배가 땅에서 완전히 떨어져 생활하는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 그러다가 주위 사물을 의지하면서 서고 발걸음을 떼면서 영장류로 변화해간다. 최후로 걷기가 시작되어 능숙해지고, 게다가 달리기로 나아가면 비로소 인간의 몸짓이 완성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어류는 어류대로, 양서류는 양서류대로, 파충류는 파충류대로, 포유류는 포유류대로, 영장류는 영장류대로,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우주 이치에 맞는 생명을 살다 간다. 그들의 삶에는 심신 분열도 없고, 자아와 우주의 분리도 없다.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의 걷기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다. 걷기의 진리를 미처 자각하기 전에 인간은 자아폭발(스티브 테일러)이란 분리를 겪으면서 걷기에서 스스로 소외되었다. 걷기에서 소외된 장구한 역사를 우리는 문명이라 부른다. 문명이 이제 인간을 인간이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어찌할 것인가?


걷기의 진리를 복원해야 한다. 걷기를 되살려야 한다. 걸을 수 있음에도 걷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당장 걸어야 한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기어야 한다. 기지 못하는 사람은 배밀이해야 한다. 배밀이도 못하는 사람은 뒤집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걷기를 복원하면, 구구한 설명 필요 없이 인간이 왜 인간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걷기란 무엇인가? 이미 <녹색의학은 여성이 남성과 다름을 인정하는 의학이다-『이브의 몸』(14)>에서 대강을 밝혔다. 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키는 인간의 존재 양태다. 두 발과 다리는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만 땅에서 서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서로 단절된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본령이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하모니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 인간 행위다. 몸짓으로서 인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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