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적 학대를 경험한 여성의 84.5%는 그 경험의 부정적인 영향이 평생 지속되며, 자신의 몸과 자아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이 크다. 그들은 성적 학대를 경험하지 않은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거나 유지하지 못하며, 자신의 연인이나 배우자와 있을 때도 옷을 벗거나 불을 켠 채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351쪽)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는 말을 페미니스트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보편명제로 올리기에 하자 있는 말임이 분명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비수 같은 말임 또한 분명하다.
성적 학대를 경험한 한 여성이 어떤 인문학공부 모임에서 그 사실과 그로 말미암은 고통에서 쉽사리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들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왜, 그걸 내려놓지 않느냐?’였다. 자기 연민에 빠져 징징거리는 것은 인문적 삶에 반한다는 비판이 날아들었다. 놀랍지도 않게,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놀랍지도 않게, 그들의 리더, 아니 스승은 뜨르르한 철학자였다. 스승은 공개적 질타가 치유라며 가차 없이 그 여성을 공격했다. 그 여성은 다음부터 그들을 무서워했다.
이게 그들한테만 특수하게 일어나는 일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태도는 성폭행 당했다고 울부짖는 여고생 딸의 따귀를 후려갈기며 ‘몸 간수를 어떻게 했기에’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여주인공의 엄마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놀랍지도 않게 이 태도는 남성을 내면화한 것이다. 놀랍지도 않게 정서적 공감에 터한 평등한 소통을 내던진 채 이성적 분석에 터한 일방적 훈계를 집어든 남성을 인문학이랍시고 뻐기는 것이다. 놀랍지도 않기만 한 이 풍경에서 쪼끔 놀라운 상상을 한 번 해보자.
그들 가운데 동성애자가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가 성적 학대의 “부정적인 영향이 평생 지속되며, 자신의 몸과 자아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며, 자신과 함께 “있을 때도 옷을 벗거나 불을 켠 채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어찌 반응했을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성애자 남성이고 비-학습 양성평등주의자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상상할 수 없다. 다만 여성 동성애자라도 자신이 남성을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 태도는 달라질 것이 없으리라 볼 뿐이다.
성적 학대에서 인식과 삶 전체의 왜곡까지 여성은 중첩적으로 수탈당한다. 피해자인 여성이 수탈에 부역하면 중첩은 더욱 교묘해진다. 이 질곡에서 벗어나는 길은 수탈당한 여성을 치유하는 사후 방책에 있지 않다. 수탈의 원천을 봉쇄해야 한다. 수탈의 원천을 봉쇄하려면 이 남성문명, 그러니까 백색문명의 멱을 따야 한다. 백색문명의 멱은 일극집중의 거대구조다. 일극집중의 거대구조는 소미심심의 네트워크로써만 무너진다. 소미심심의 네트워크는 아픔과 슬픔으로 나지막이 직조된다.
아픔·슬픔의 네트워크에 트인 남성이 한 축이 될 필요는 있다. 남성이 아픔·슬픔의 네트워크를 주도해서는 안 된다. 두 번 겪을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