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거의 대부분의 약물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성 기능 장애를 일으킨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항고혈압제 때문에 발기불능인 남성에게는 실데나필(상품명 비아그라)이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그와 같은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생명을 생각한다면 심각한 심혈관계 질환을 치료하는 일은 성 기능 장애를 개선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러나 성 기능 장애라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 삶의 질은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347-348쪽)


『이브의 몸』(5)에서 메리앤 J. 리가토의 약, 그러니까 제약회사가 만드는 화학합성물질 문제에 대한 안일한 자세를 지적하였다. 이 지적은 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안타까운 점이다. 일단 항고혈압제 문제에서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 치명적 심혈관계 질환과 성이라는 삶의 질이 지니는 모순 관계를 고민한 것은 당연하고 고맙다. 그러나 고마움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하나, 항고혈압제가 심각한 심혈관계 질환을 치료한다는 말이 사실이어야 한다. 다른 하나, 실데나필(상품명 비아그라)이 백색화학합성물질이 아니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물론 둘 다 아니다. 우선, 항고혈압제는 그냥 혈압을 강제로 떨어뜨릴 뿐이다. 혈압이 높아지는 기작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명료한 반증이 있다. 정말 항고혈압제가 치료제라면 언젠가 치료가 되고 그 다음에는 복용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그럴 일 없다. 이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다. 치료커녕 부작용이나 수반하므로 사기다.


실데나필, 그러니까 비아그라는 대체 어떤 물질인가? 우리가 그 세세한 지식을 공유할 필요까진 없다. 다만 원리를 따져보자. 항고혈압제 부작용에 쓰는 물질이라면 실데나필은 이치상 항고혈압제와 길항하는 기작을 지녀야 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 작용하는 부위의 특수성 때문에 이 어긋남이 그냥 넘어가는 것뿐이다. 정말 이 물질은 딱 그 부위에서만 그런 좋은 작용을 하고 마는가? 그럴 리 없다. 결국, 이 물질은 본디 염려했던 부작용을 낳고 만다. 하여 이 물질 제조자 ‘모리배 갱단(피터 C. 괴체)’인 다국적 제약회사 화이자는 심혈관계 질환을 지닌 사람들에게 쓸 때 주의하라는 경고를 교묘한 문구로 어지럽게 늘어놓는다. 그걸 의자가 읽나, 환자가 읽나.


하나 더. 두 전제 다 입증됐다 치자. 그런데 대체 혈압이 얼마에서 얼마면 항고혈압제를 먹어야 하나? 대체 성 기능 장애가 어느 정도면 그 실데나필을 먹어야 하나? 전자는 근거 없는 객관 120-80이고, 후자는 정처 없는 주관 욕망의 문제다. 후자는 논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전자다. 120-80은 대체 어디서 나온 기준인가? 필경 백인 남성 청년이 기준일 것이다. 실제로 항고혈압제가 긴절한 연령대는 자신의 나이에 90을 더한 수치가 수축기 정상혈압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런 이야기를 임상 현실에서 하지 않는 이유는 묻지 않아도 다 안다. 그럼에도 약을 먹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다. 거짓말과 두려움 조장은 백색 마케팅의 쌍끌이다.


마지막으로 중대한 문제가 있다. 분명히 저자도 항고혈압제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성 기능 장애를 일으킨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임상 현실에서 이 문제를 먼저 호소하는 여성은 전혀 없다. 진단 과정에서 신중하게 물어봐도 그렇다고 대답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 이유는 단 하나다. 대체 그게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거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성욕을 정색하고 직면하며 살피며 추구하며 살지 않았다는 거다. 이는 개인 생리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정치 문제다. 여성의 성욕과 기능, 그 생활이 삶의 질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사회정치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실데나필이라는 ‘해결책’이 없음을 말하는 것은 본말의 전도다. 양성평등은 sexuality와 gender의 양면이 함께 사유되고 이행되어야 한다.


녹색의학은 고혈압 증상만 억제하는 가짜 약을 만들지도 쓰지도 않는다. 따라서 발기부전에 요법 포르노를 개발할 필요도 없다. 혈압도 성도 인간 생명과 생애 전체를 놓고 판단한다. 인간 생명과 생애 전체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사회정치 흐름을 불가피하게 탄다는 엄연한 사실에 주의한다. 진실에 터하려 하기 때문에 녹색의학은 언제나 스스로 흔들어 안일함을 깨운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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