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사회에서 시각독재tyrannis visifica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극한을 넘어 날조 이미지로까지 드러내고 극한을 넘어 환각으로까지 탐시貪視하느라 미쳐가는 세상에서 눈은 본의 아니게 자본의 총아며 타락의 상징이 된다. 눈은 잘못이 없다. 있다면 오징어 눈만도 못한 불완전성을 지닌다는 것뿐이다. 문제는 백색 시각이다.


백색시각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시각은 중심시각에서 형성된다. 중심시각은 선택한 개체에 시종일관 집중한다. 집중시각은 전체에 주의하지 않는다. 전체를 희생해서 개체를 비대하게 만들 때, 불평등 구조가 탄생한다. 불평등 구조의 종착지가 바로 포르노다. 포르노는 거대하게 발기한 자아, 지식, 돈, 권력 잔치다.


백색시각을 전복하는 시각 혁명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중심시각의 타파다. 비-중심시각으로 전체성을 복원한다. 집중의 일관성을 무너뜨리고 전 방위로 시선을 개방한다. 모든 것에 주의하여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으면 크고 작음의 차별이 없어진다. 차별이 사라져 텅 빈, 텅 비어서 멍한 눈길에 무한한 자비가 배어든다.


눈의 모습에 주의하면 다음 길이 보인다. 눈은 왜 상하 아닌 좌우로 길쭉할까? 눈은 넓이의, 그러니까 수평의 감각을 기본으로 한다. 높이와 깊이의 감각은 부차적이다. 수평 감각은 랭크rank 아닌 링크link, 그러니까 상하차별 아닌 평등연대, 고매·심오 아닌 수수·평범의 감각이다. 끊임없이 좌우를 돌아보는 눈길에 따스한 사랑이 스며든다.


녹색시각의 혁명은 시각독재의 일극구조를 무너뜨릴 뿐, 중심시각 자체를 폐하지 않는다. 중심시각과 비-중심시각이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어 개체와 전체의 균형이 ‘일렁고요’ 사건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일렁고요’는 그냥 오지 않는다. 시중時中의 특이점마다 비폐비개非閉非開의 눈으로 성찰해야 한다. 중도中道의 정도正道다.


혁명의 마지막 한 순간에는 결연히 눈을 감기도 해야 한다. 실재 악의 멱을 딸 때 그것이 전시하는 포르노를 감상할 필요는 없으니까. 혁명의 마지막 한 순간이 오기 전에 정색하고 어떤 순간 결연히 눈을 감는 제의 또는 놀이를 할 필요도 있다. 필연이 우연의 옷을 입고 도둑 같이 올 수 있으니까. 깨어 있는 일이 은총만은 아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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