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 폄훼의 철학적 흐름 선두에, 정상에 섰던 사람이 바로 칸트다. 그는 시각, 청각, 촉각은 객관적 능동적 감각이고, 후각(따라서 미각)은 주관적 피동적 감각이라고 구분 지었다. 전자는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강요되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는 혐오 대상이다. 주체로서 이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그에게 이 구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오류무아지경, 무지삼매경 맞다. 그러나 칸트는 절대군주였다. The King can do no wrong! 칸트의 이런 강박적 이성독재는 헤겔의 중립화와 포이어바흐의 복권을 거쳐, 니체의 돋을새김이 있기까지 전 유럽을 지배했다. 니체는 후각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의 전령이며 공감, 직관적 통찰, 자비심, 윤리의식, 자기성찰의 기원이라고 갈파했다. 그러나 아직도 니체의 칸트 해체는 비주류 딱지를 완전히 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이것은 서양 철학사에서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아폴론적 전통과 디오니소스적 전통 사이의 대칭성, 그 대칭성의 파괴를 둘러싼 오래된 에피소드의 근대 버전이다. 이성독재의 길고 긴 세월 동안 코는 그야말로 숨 쉬는 도구로, 그러니까 당연히 있는, 배경 같은 존재로, 더군다나 텅 빈 구멍으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후각, 그러니까 감성을 ‘쌍것’ 취급하는 전통의 결과다.


이런 관성은 진화론적 뇌 과학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파충류 뇌에서 포유류 뇌로, 그리고 영장류 뇌로 진화하면서 본능-감성-이성·의지의 계층구조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진화론적 뇌 과학 이론이다.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을 이해하지 못 할 바 없다. 하지만 나중에 생긴 것이 고등한 것이라는 식의 발상은 동의할 수 없다. 진화라는 표현 자체에 이미 선형적 발전의 인식론이 전제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변화가 다 발전은 아니다. 달라진 삶의 조건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는 것일 따름인 변화를 모두 진화/발전으로 보는 것은 서구의 직선적 또는 종말론적 시간관의 투영이 아닐까 싶다.


이런 프레임을 내려놓으면 오히려 거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생명에서 가장본질적인 것이 생긴 뒤, 생명현상을 더욱 유연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비본질적, 부차적 기능들이 생겨났다고 말이다. 비본질적, 부차적인 것이 인간의 특징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여기는 생각을 딱히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것을 혐오 대상으로 삼는 생각까지 용인할 수는 없다. 건강할 때든, 병들었을 때든, 치료할 때든, 감성, 곧 후각은 그 어떤 감각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이성과 감성이 극단적· 순간적으로 맞물릴 때, 감성이 이성을 제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감성은 자연이고, 자연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당위이고, 당위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근대정신이 이성을 왕으로 옹립하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왕의 정체가 드러났다. 왕의 귀는 당나귀 귀였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인간 생명은 감성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끝난다. 인간의 모든 정신 현상의 중심과 경계에는 감성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말하는 감정은 감지感知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이성은 이지理智 감성이다. 흔히 말하는 의지는 지향志向 감성이다. 새로운 왕의 탄생이다. 아니 참된 왕의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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