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醫者로 사는 동안 제게는 저를 아버지라 부르는, 또는 그리 여기는 사람이 여럿 생겼습니다. 숙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 정도 사랑과 신뢰, 그리고 존경의 정서가 쟁여졌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마음치유 길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지닌 정서의 폭은 십인십색이거니와 매우 각별한 인연으로 저와 맺어진 한 청년이 있습니다.


어느 해 겨울, 처음 저를 찾아왔을 때, 그의 상태는 마치 그 계절과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옴짝달싹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깨질 듯 달려드는 두통만이 살아 있는 표지였습니다. 바짝 마른 몸에 더 바짝 마른 마음이 일그러진 문짝처럼 을씨년스럽게 매달려 있는 풍경은 기괴하기까지 했습니다. 얼굴에는 ‘신기神氣’가 파르라니 흘렀습니다. 눈빛 앙칼지기도 여간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사회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극심한 대인공포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하다못해 알바 자리 하나 구하려 해도, 사람 눈 마주보며 면접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두통은 심해졌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치료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상한 한의사 하나를 발견하고 달려왔습니다.


기본적인 상황 파악을 끝내고 치료 일정을 잡은 첫 상담 일주일 뒤, 두 번째 상담 예약을 했습니다. 무심코 잡아 놓고 메모하지 않은 탓에 그 예약일이 성탄절인 줄 몰랐습니다. 까맣게 잊었으니, 한의원 문을 턱 하니 닫고, 저는 휴식을 즐겼습니다. 밤이 되어 혹시 온라인 예약 들어온 것이 있나, 살피려고 홈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아뿔싸! 문 닫힌 한의원 앞에서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다 돌아가서 쓴 그의 글이 분노와 실망을 그득 문 채, 상담실을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황급히 사과 글을 올리고, 바로 다음 날 오전 상담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제 사과와 제안을 받아들여, 항의 글을 내렸습니다. 저는 제 사과 글을 내리지 않고, 끝까지 걸어두었습니다. 이따금씩 그 글을 읽으며, 자세를 가다듬곤 했습니다. 이렇게 액땜을 다부지게 하고 나서, 저와 그의 인연은 빠르게 깊어졌습니다.


그의 부모는 사이가 본디-그가 기억하는 한-좋지 않았습니다. 불화는 다양하게, 그러나 한결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었습니다. 그의 10대 중반 무렵,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린 사건이 악화의 기폭제로 작용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외도로 비화하면서 이혼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선택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받은 상처는 컸습니다. 제대로 학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아, 생활도 궁핍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점점 더 소원해졌습니다. 어머니는 시나브로 알코올중독에 빠져들었습니다. 우울과 불안이 함께 그를 덮쳤습니다. 사소한 일상마저 깡그리 무너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그대로 계속될 때, 그가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제 눈에 보였습니다.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 눈에만 들어오는 육감 같은 것입니다. 다름 아닌 무속인의 길입니다. 사회적 평판을 문제 삼아서가 아니라, 그 삶의 신산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기에, 어찌 하든 피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고민하던 제게 홀연 타개책이 떠올랐습니다.


“제3의 길이 딱 하나 있다. 좋은 분 소개할 테니 가봐.”


제가 던진 승부수는 다름 아닌 요가 마스터의 길이었습니다. 제가 소개할 사람 이름을 말했더니,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연히 한 번 뵌 적이 있는 분이라며, 신기해했습니다. 그는 흔쾌히 제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늘 순탄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지금 요가 마스터의 길을 나름대로 곡진히 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뜬금없이 그가 오겠다고 연락을 했습니다. 맛있는 저녁을 사주며 그가 말했습니다.


“그 날 아버지가 던지신 승부수, 아무래도 제 인생에서 신의 한 수 같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