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함께 밥 먹는 것을 숙의 과정에 포함시킵니다. 당사자의 허락을 전제로 함은 물론입니다. 또 당사자의 허락을 조건으로 술잔을 기울이도 합니다. 대부분 한의원 근처 소박한 백반 집에서 합니다. 그 집은 인공조미료를 거의 넣지 않은 음식 대부분을 주인이 직접 만듭니다. 주인 내외가 제 또래라 친구 삼아 마음 편히 드나들며 이따금 함께 소주도 한 잔 씩 합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을 데리고 저녁밥을 먹으러 들어섰습니다. 안주인이 예의 그 시원스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아유, 원장님! 오늘은 배우를 모시고 오셨네!”
그는 배우 지망생이었습니다. 단연 출중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단연 심각한 내면의 고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만큼 말입니다. 그의 검고 커다란 눈망울에는 언제나 쏟아질 준비가 돼 있는 눈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를 짓누르는 가장 육중한 말은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 특히 어머니가 노래 후렴구처럼 내뱉는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네가 성공해야 우리 집안이 일어선다!”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일어선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본디 뜨르르했는지 전혀 공감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릴 적부터 그는 이 말에 귀가 닳아버렸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그런 말 뒤에 아무 것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투자, 그러니까 재정적 지원, 뭐 이런 것 말입니다. 생활이 그다지 넉넉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벌거벗겨 벌판에 세워놓고 대박 나서 돌아오라 손 비비는 꼴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개나 소나 가는 무슨 연극영화과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알바 뛰어 번 돈으로 사설 연기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하고 오디션도 보며 정신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돈이 모자라면 학원 등록도 거른 채 아등바등 견뎠습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그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하염없이 눈물이 굴러 내렸습니다. 제가 화장지 박스를 통째로 밀어주며 말했습니다.
“엉엉, 소리 내며 우세요.”
찰나, 그에게 웃음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더니, 이내 대성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밖에 있는 간호사는 고요한데 침 꽂고 누워계신 어르신들이 나지막이 혀 차는 소리가 스며들어 왔습니다. 통곡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제가 손뼉을 치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연기였습니다.”
그의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칼날이 번쩍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해묵은 억압을 빠듯이 뚫고 올라와 온몸으로 운 사람한테 연기라니요. 조금 뜸을 들였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치를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을 보고 현실보다 훨씬 과장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음성도 발음도 어휘도 표정도 몸짓도 웃음도 울음도 모두 현실에는 없는 무엇으로 여깁니다. 정반대입니다. 명배우의 연기야말로 고스란한 현실입니다. 이래저래 병든 우리 일상이 우리로 하여금 접히고 찌그러지고 꼬이고 뒤틀리고 토막 난 음성·발음·어휘·표정·몸짓·웃음·울음을 내게 합니다. 치유는 명배우의 연기처럼 펼치고 펴고 풀고 바로잡고 이어주는 음성·발음·어휘·표정·몸짓·웃음·울음을 내는 것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에게 삶은 그 자체로 치유입니다. 그러므로 연기입니다. 제대로 된 옹골찬 연기가 자신의 아픈 삶에 예의를 갖추는 정중한 자세입니다.
저는 안성기 같은 배우는 아닙니다. 저는 마음 아픈 사람과 숙의하는 과정에서 치유 연기를 직접/시범 하고, 또 가르치는 배우입니다. 저는 그와 함께 그 자신의 상황을 그때그때 정확하게 연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숙의했습니다. 밥 먹을 때도 소주 한 잔 할 때도 이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알바를 할 때도 심지어 연기학원에서 연기를 배울 때도 삶의 한가운데서 연기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유념하도록 당부했습니다.
그는 숙의 초기에 우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울 상황이 아닌 데서도 울곤 했습니다. 제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왜 울지요?”
생전 처음 받은 질문이기라도 한 듯 놀라며 찰나적으로 그는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나지막이 ‘그러게요.’ 합니다. 저는 다른 감정으로 표현해야 할 것을 모두 눈물로 몰아버리도록 억압되어 그렇다는 이치를 일러주었습니다. 한 동안 울지 않을 상황에서 울지 않는 ‘연기’를 숙의했습니다.
과다하게 우는 그 이상으로 그는 과다하게 웃었습니다. 마치 반드시 웃어야만 한다고 결심한 사람처럼 말을 꺼내기 전부터 웃기 시작해서 중간에도 연신 웃고 끝내고 나서도 웃었습니다. 제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왜 웃지요?”
생전 처음 받은 질문이기라도 한 듯 놀라며 찰나적으로 그는 웃음을 멈추었습니다. 나지막이 ‘그러게요.’ 합니다. 저는 그 웃음이 눈물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라는 이치를 일러주었습니다. 한 동안 웃지 않을 상황에서 웃지 않는 ‘연기’를 숙의했습니다.
울음과 웃음을 일상으로 돌려놓는 것만으로도 마음 상태는 훨씬 좋아졌습니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 뒷바라지를 하며 힘들게 연기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와 함께한 시간이 실제로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알지 못합니다. 다른 어떤 배우 지망생도 알지 못하는 연기의 진실을 알고 있는 한 언젠가는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신뢰를 그에게 보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