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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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무척 활달한 문옥주 할머니는 사실 살아 있는 ‘슬픈 백과사전’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전의 한 쪽 분량도 글로 쓰지 못한다.

1942년 2월부터 3년 동안 미먄마 각지에서 강제로 위안소 생활을 했다. 할머니 말로는 하루에 병사를 50명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잊을 수 없는 맛도 있다. 랑군의 위안소에 있었을 때다. 사단 사령부의 창고계 병사가 꽁치 통조림을 가져왔다. 달랑 통조림 하나에 채소와 소금을 곁들여 여자들 열 명이 나눠 먹었다.

“맛있었어. 최고였어.”(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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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늦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문옥주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1996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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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길러주신 할머니는 조선이 거의 다 스러질 무렵 강원도 완고한 잔반의 딸로 태어나 교육을 전혀 받지 못 했다. 당신의 이름 석 자조차 제대로 쓰실 수 없었다. 타고난 슬기와 수완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아들 둘과 딸 둘을 홀로 키워내셨다. 오동나무 장 같은 성품을 지니셨으며, 몸으로 익힌 현명함을 한 평생 단단히 유지했던 분이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작은 딸의 영향으로 동네 자그마한 교회를 다니셨다. 소박한 신앙의 이로를 지니신 한편 통속한 교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의 판단대로 자유롭게 움직이셨다.


청년 초기 시절 대부분 나는 집을 떠나 살았다. 그러다 한 동안 불우의 시간을 할머니 곁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른 오후 나른한 산동네 적막 속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셨다. 20분가량 지났을까. 파전 두 장, 소주 한 병을 쪼그만 쟁반에 담아 들고 들어오셨다.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할머니는 한쪽 눈을 찡긋하셨다.


“맥 빠지는 날은 소주가 책보다 낫느니라.”


내 인생 최고의 파전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소주였다. 그 최고의 맛은 좌절과 정지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결코 잊을 수 없는 해후였다. 그땐 몰랐지만 내가 느지막이나마 삶에 종자신뢰를 지니게 된 데에는 이 해후와 엮인 힘이 작용했을 터. 그 뒤부터 나는 할머니 식 파전이 아니면 파전 맛을 모른다. 그 뒤부터 나는 비록 가짜지만 희석식 시중 소주를 소울 푸드로 여긴다.


문옥주 할머니의 슬픈 백과사전은 꽁치 통조림을 소울 푸드 목록 제1순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오늘 저녁엔 문옥주의 통조림 꽁치를 내 할머니의 파전에 싼 안주와 함께 내 할머니의 소주를 마셔보면 어떨까 싶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맛있었어. 최고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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