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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평점 :
·······갈 곳을 미리 정하지는 않았지만 소말리아만큼은 꼭 가야겠다고 처음부터 마음먹었다. ‘먹는 인간’을 소말리아 없이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아와 내전과 무시무시한 수의 죽은 자로 가득 메워진 이 나라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특별히 무참한 1주일은 아니었다고 지금은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몇 번이나 어지럼을 느끼고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했다.·······눈이 풍경에 찔려버렸다고 말해도 될까? 나로서는 7일 간의 기억과 나를 향한 물음을 일지에라도 기록해 보여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다만 지금 보여줄 일지의 발췌에는 ‘먹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먹는 풍경이 뭔가에 납작하게 눌려 부서졌기 때문이다.(189-190쪽)
같은(첫째-인용자) 날 저녁. 기온 30도.
공과대학 건물로 가보니 키스마요에서 온 피난민으로 꽉 차 있었다. 현관에서 대변을 보는 아이도 있어서 숨이 막혀버릴 만큼 불결하다.
슬픈 이야기만으로 공책이 채워진다. 3층 교실에서 웅크리고 있던 소녀의 모습이 유난히 애달프게 내 마음을 끌었다.
파르히아 아하메드 유스프. 열네 살이지만 서른 살도 넘어 보였다.
내가 이 일지를 기사로 정리할 무렵, 파르히아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영양실조. 결핵.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일어설 수도 없다. 목소리도 눈물도 나지 않는다. 오로지 기침뿐이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소녀다.
얼어붙은 그림자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따금 그녀는 집고양이가 볼일을 보는 곳처럼 흙을 넣어둔 용기에 소리도 없이 배설을 한다. 배설물과 함께 살고 있다.
관자놀이에 바늘 같은 손가락을 대고 이 세상의 온갖 괴로움을 타인의 몫까지 전부 자기 몸에 짊어진 듯한 눈으로 14년 된 생명이 훌쩍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간절히 빌 수밖에 없었다.(194-195쪽)
같은(이레째-인용자) 날 늦은 밤. 기온 19도.
·······나는 이 거리에서 첫날 만난 소녀를 찾는다.
결핵과 영양실조로 죽기만 기다리는 파르히아.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소녀. 내 시선 아래 어디쯤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 생명이 다했을까?(207-208쪽)
·······지극히 상식적인 내 ‘중심 의식’은 모조리 무너졌다고 해도 좋다.·······이를 특별히 자각한 것은·······모가디슈에서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소녀를 만났을 때다. 굶주린 나머지 얼마 안 있어 죽을 모습으로 내 눈앞에 존재한 파르히아 아하메드 유스프. 그곳에 지금 세상의 눈에 띄지 않는 중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세상의 중심이라고 표시하는 거대한 기념물을 세울 장소는 워싱턴DC도 런던도 도쿄도 아닌 바로 그곳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목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고 시력마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선진국 정상들의 수상쩍고 억제된 얼굴과는 비교할 수도 없으며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353쪽)
“이 세상의 온갖 괴로움을 타인의 몫까지 전부 자기 몸에 짊어진” 파르히아가 기침이랑 배설물이랑 함께 살고 있는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다. 파르히아의 잃어버린 목소리에 담긴 일묵만뢰一黙萬雷의 한 문장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한 말, 바로 그것이다.
“다 이루었다!”
파르히아 이후 인간의 모든 성취는 포르노다. 신성모독이다. 가짜다. 먹고 일어서고 말하고 울고 보는 모든 행위가 가증스러운 것이다. 인간 스스로 딱 두 가지 행위만 허락한다. 기침. 배설. 그리고 고요히 “생명이 훌쩍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이 묵시록적 풍경만이 “수상쩍고 억제된” 문명의 파국을 저지할 수 있다.
더 할 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