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하고 깔끔해 보입니다. 똑 떨어지는 서울말을 구사합니다. 경위가 바르다는 인상을 줍니다. 함부로 끼어들거나 헤프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맑은 정신일 때 그가 그려내는 최상의 풍경화입니다. 막상 아프고 슬픈 내면 풍경으로 들어갈라치면 마치 내면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반응합니다. 기억도, 기억에 붙어 있는 감정도 일절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중증 알코올중독입니다. 시설에도 들락거렸으나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지친 가족이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는 영악하고 치밀하게 술만 ‘흡입하는’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몸도 마음도 붕괴되어갔습니다. 이대로 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가족이 마지막 힘을 내어 제게 데려왔습니다.
저는 일단 그가 병과 생을 숙의할 힘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깍듯한 페르소나에 말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얼마 가지 못 했습니다. 그는 오직 껍데기로만 존재하고 껍데기로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더는 속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드러낼 속이 본디부터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대화 지속은 무의미했습니다. 잠깐 동안의 퍼포먼스 외출을 끝내고 그는 이내 옛 생활로 복귀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그에게 내면은 없는 걸까? 사실 우리가 쉽게 내면이라는 말을 쓰지만 외부 세계와 절연된 내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면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되는 기억·감정·각성·의지의 흐름입니다. 결국 내면의 내용은 관계의 내용입니다. 내면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로 본다면, 마치 내면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가 접촉은 하지만 실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의 결과입니다. 실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까닭은 미상불 상처일 터. 그 상처를 각성하지 못하는 한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을 수 없습니다. 그의 경우 상처는 즉자적 상태, 그러니까 몸으로 들어간 상태이기 때문에 각성 이전의 아득한 곳으로 퇴행했습니다. 퇴행의 막강한 후원자가 바로 술입니다. 술은 모성의 이미지로 그를 감싸 각성의 서늘함을 차단합니다.
이런 전경 앞에서 의자는 겸허와 절망을 동시에 느낍니다.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일 수 없는 한, 고통 받는 그가 가는 길을 빤히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를 데리고 온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족의 내면을 보듬어 잘 견디게 하는 일이 저로서는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