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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평점 :
·······하얀색 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그때 포도 덩굴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움직인 듯했다. 사람 그림자다. 깜짝 놀랐다. 사람 그림자도 무서워하며 모습을 감췄다.
병사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좇아갔다. 안나 스모야크라는 72살의 키 큰 할머니였다. 할머니보다 9살이 적은 남편 미리보이는 1991년 집 근처에 폭탄이 떨어졌을 때 충격을 받고 죽었다. 할머니는 그 일이 애통하고 애통해 지금도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죽고 싶다고 한다. 안나가 말한다.
맑게 갠 날 갓 짠 우유가 든 깡통을 양손에 들고 걷는데, 갑자기 전차가 나타나 펑펑 대포를 쏘아댔다. 안나는 기겁해서 우유가 든 깡통을 떨어뜨렸다.
남편은 가슴을 누르며 쓰러졌다. 양아들도 죽었다. 며칠 만에 안나의 머리카락은 백발로 변했다.
“그때부터 뭘 먹든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게 됐지.”
할머니는 글로브처럼 커다란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145-146쪽)
안나가 다시 묻는다.
“여보게, 내일 다시 와줄 거지?”
나는 포성에 등이 떠밀려 마을을 떠났다.
안나는 내일 눈물어린 수프를 어두운 부엌에서 혼자 먹겠구나.(149쪽)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다. 계층마다 식후에 묻는 말이 다르다고 한다. 빈곤층은 ‘배불리 먹었느냐?’ 한다. 중산층은 ‘맛있게 먹었느냐?’ 한다. 부유층은 ‘분위기가 멋있었느냐?’ 한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눈물어린 수프를 어두운 부엌에서 혼자 ”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며 먹은 안나 할머니에게는 뭐라 물을 수 있을까? 저자가 한 말을 의문문으로 바꿔보겠다.
“뭐든 좀 더 드시는 게 좋(147쪽)지 않을까요?”
배불리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최소한의 영양 상태라도 유지하려면 그 정도로는 모자라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그 말이 안나 할머니 귀에 쏙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지켜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참여가 여기까지다.
세월호 가족 몇이 어느 음식점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워낙 주위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분들이라 조심스러워 나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한 채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들은 반주도 한 잔씩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누군가 농담 건네면 웃기도 했다. 세월호 엄마가 밥 먹으면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느냐?’며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지만 내게는 그렇게 식사하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거룩해 보였다. 할 수만 있었다면 소주라도 한 잔 권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뭐든 좀 더 드시는 게 좋지 않겠느냐 묻고 싶었다. 결곡한 애도를 위해 그들은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백세 시대에 육십 막 넘긴 나이를 오래 살았다 하긴 멋쩍지만 요즘은 제법 긴 세월 살긴 했다는 생각이 든다. 제자, 후배들의 부음을 접할 때 특히 그렇다. 요 며칠 전에도 애제자 하나를 앞세웠다. 그의 빈소에 애써 들르지 않고 홀로 먹은 저녁밥은 모래와 방불했다. 홀로 마신 소주는 물과 흡사했다. 어제, 그를 기억하는 다른 제자와 오래토록 그를 이야기하며 밥 먹고 소주 마셨다. 밥은 분명히 쌀이었고, 소주는 분명히 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