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단어를 써야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로 와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시간을·······가슴팍이 결릴 때까지 웁니다. 십오 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내게 그런 용기와 남은 사람들 따위는 걱정하지 않을 뻔뻔함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무서워집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습니다.·······누가 떠밀지도 않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닌 결혼이었습니다. 배우자가 누가 봐도 못된 인간이라거나, 그 가족이 미칠 듯 스트레스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과 저는 너무나 다릅니다. 사소한 취향부터 말버릇하나까지 제가 싫어하는 것들은 모두 모아놓은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딱 하나 저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사람이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 하나로 연애 동안 불거지는 불안들을 모른 척 했습니다. 멈추려고만 했다면 언제든지 멈출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헤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를 잡았고 저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찾아온 그 사람 손을 잡았습니다. 아무런 확신이 없는 중에도 결혼은 진행되어갔고, 주변사람들의 시선과 속상해 하시는 부모님 생각에 머뭇거리며 망설이다 결국 결혼식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힘이 듭니다. 선생님. 스스로 제 성격을 알기에 처음부터 단호하게 털어놓고 다짐받았던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는 걸 알았을 때, 어떤 날 일기엔 소름끼치도록 그가 혐오스럽다고 쓰여 있었습니다.·······어제는 결국 그 사람 입에서 자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면 헤어지자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 사람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그럼 그러 마, 하며 짐 쌀 줄 알았는데, 심장이 내려앉았습니다. 저는 또 헤어질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오히려, 그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지하고 있었던 제 자신이 당황스럽고 인정하기 싫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도 있기 때문에 죽을 만큼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결국 저렇게 쉽게 헤어짐을 말할 거면 왜 그때 날 잡았나.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제게서 마음이 떠났음을 느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타인보다 낯설게 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손끝부터 하얗게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슬픔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뭐라 표현할 길 없는 감정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자 라는 생각보다, 그런가, 헤어져야 하는가?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결혼을 멈추지 않았을까? 두려움과 자책감에 잠도 오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도 벼랑 끝에 서있다는 걸 알면서 헤어짐을 입에 담은 그가, 그리고·······구구절절 스스로를 변명했던 제가 용서되질 않습니다.


저 사람과 나 둘 다 서로를 놓아줘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닌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제 스스로가 너무나도 단호하게 이렇게 이어지는 상황들을 견딜 자신이 없다면, 더 늦기 전에 이혼하는 게 맞는지 판단하기 너무나 힘듭니다. 선생님, 어찌 해야 할까요?”


어느 날, 익명으로 제게 온 편지입니다. 5년이나 지난 기억이었지만 한눈에 그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행복하다 느낀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외도, 도박, 사채, 폭력에 절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어려움에 쩔쩔매다가 집 나가겠다는 말을 수없이 되뇔 뿐 어떤 타개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맏이로서 부담감은 크게 느꼈지만 부합하는 이행이 따르지 못해 늘 자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연애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다정다감하지 않은 터라 그 자신도 친밀감 부분에서 매우 서툴렀습니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될수록 상처만 커갈 따름이었습니다. 아침에 눈뜨면 불안이 파도처럼 밀어닥칩니다. 무력한 시간들로 하루가 채워지면 가슴은 텅텅 비어갔습니다. 그만 살자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올랐습니다.


짧게나마 상담한 뒤 얼마 동안, 그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저와 맺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소식이 끊겼습니다. 저 편지 속의 힘든 연애와 결혼 생활이 원인이었습니다. 편지 후 연락을 취했지만 그를 실제로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천 리 밖 어느 도시에서 ‘가슴팍이 결릴 때까지’ 우는 그를 떠올리면 참으로 가슴팍이 결려오는 듯합니다.


지금 손에 바리공주의 생명수를 들고 있다 해도 제가 직접 우간다 어느 마을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는 소녀 하나를 살릴 수 없는 게 냉정한 현실입니다. 극진함도 능력도 구체적 인연으로 엮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간절한 호소에 폐부를 찔려 온 영혼이 흔들려도 가 닿지 못할 때, 숙의의학 하는 자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은 숙명 아닐까 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그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릅니다. 기억이 선명할수록 아리디아린 형벌감에 잠겨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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