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를 받은 한 아이가 우울증 치료를 위해 제게 왔습니다. 아이는 부모 중 양육을 맡지 않은 쪽에 극렬한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필경 양육을 맡은 쪽에서 반복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주입한 탓일 것입니다. 양육자 본인은 강력히 부정했지만 저는 제 오랜 경험으로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비단 그 적개심뿐만 아니고 생각과 행동 전반이 심하게 편향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양육자의 아바타로 키워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것이 양육자가 얻는 이득일 테지만 아이한테는 엄청난 손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선 시급히 양육자에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아이 앞에서 전 배우자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말, 엄금합니다. 아이 영혼이 죽어갑니다.”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를 물으며 아이 마음이 어떻게 다쳤는지 살폈습니다. 아이는 연령에 비해 정신 발달의 지체가 뚜렷했습니다. 유아적 마법사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양육자와 그 직계존속의 애지중지 학대를 계속 받아 현실 삶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약했습니다. 저는 아이의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양육자에게 전 배우자와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쪽 이야기도 들어봐야 치우침 없는 상담일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아이의 양육 조건의 변화 가능성을 타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세 사람이 만났습니다. 계속 이런 만남이 이어질 것 같지 않아서 저는 양육자 아닌 쪽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양육자가 낯빛을 바꾸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제가 아이를 병들게 한 사람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내린 긴급처방에서 느낀 불편함과 연계된 반응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제가 두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아이 때문에 이혼한 것이 아닌 한, 이 문제에 아이를 연루시키면 안 됩니다. 두 분이 서로에게 품은 감정을 아이가 물려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누구의 편을 드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날 이후 양육자가 더 이상 아이를 제게 보내지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이의 특이한 말버릇, 표정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어찌 살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짐작컨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그때 보여준 양육자의 성향으로 미루어 그의 생활 조건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제가 아이 양육 조건의 열악함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 특히 양육자의 면모를 좀 더 지켜보고, 아이와 양육자의 신뢰rapport가 생길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어야만 했습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는 법이고 그 때란 것이 일방의 열정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진실 앞에 겸허히 엎드립니다. 천명을 안다는 나이를 넘기고도 이런 인연지음 하나조차 간수 못했다는 자책감이 지금도 여전히 똬리 틀고 있습니다. 오늘 그 아이가 제게 온다면 어찌 할 수 있을까요? 그때보다 훨씬 유연하고 여유롭게 감응하여 아이를 치유해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