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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평점 :
2014년 봄, 박근혜가 자행한 대학살 이후, 나는 줄곧 울보로 살았다. 눈물이 주책없지는 않아졌을 무렵 어느 날, 책 한 권에 인연이 닿았다. 누가 추천한 것도, 어디서 서평을 읽은 것도 아니다. 책은 다만 그 흑백의 얼굴을 하고 진열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나도 스치듯 지나다 문득 보고 손을 내밀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눈물이 주책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다.’라는 진부한 말에는 그 진부함을 골백번 받아 안고도 남을 진실이 있다. 논자마다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테니 나는 그저 내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이따금 육식도 한다. 홀로 일부러 육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전혀 없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를 내 생각에 말아 넣지 않으려고 흔쾌히 먹는다. 홀로일 경우는 국수에 얹은 쇠고기 고명조차 빼고 먹는다. 이런 경향성은 내 삶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1950년대 중반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먹을거리를 포함한 삶의 조건 전체가 식물적이었다. 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식물과 각별한 애착을 형성하고 있었다. 색깔, 모양, 냄새, 감촉, 소리 모두에서 민감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연두 빛 아기 호박, 앙증맞게 허리가 휜 새끼손가락만한 오이, 석유 냄새 비슷하던 돌미나리 향, 까만 흙을 털어내면 드러나는 하얀 햇감자의 매끈한 피부, 바람에 서걱대는 옥수수 이파리·······모두 10살 이전의 기억인데 한사코 순도 99.99%의 선명함을 자랑한다. 이들을 내가 단순히 먹을거리라는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식물들과 생명의 연속성에서 두텁게 이어져 있다.
내가 채소를 먹는 것은 이른바 먹방에 출연한 연예인들이 고기를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니 그들이 채소를 먹는다 해도 그 또한 나와 다르다. 나는 적어도 포르노를 찍지는 않는다. 먹는 행위에 담긴 거룩한 제의와 흥겨운 놀이의 의미가 역설적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섬광 같은 순간이 전혀 배제된 경우란 내게 있을 수 없다. 그게 내가 체득한 강원도 산골 표 ‘먹는 인간’의 정체성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10살 이후 겪은 도시빈민의 삶, 서서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라난 사회정치적 각성, 그리고 의자로서 실천해야 할 과제가 결합된 ‘먹는 인간’의 정체성이다. 여기에는 대단히 선명하면서도 복잡한 판단 기준이 얽혀 있다. 먹는 행위를 가로질러 정치적 올바름, 반 향락적 절제, 산업농 비판은 한 끼 식사마저 무심코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고뇌를 안고 있던 차에 고요히 닿은 『먹는 인간』은 지독한 가난의 기억에 연결된 내 소울 푸드 중용국수 한 그릇마저 부끄럽게 만들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눈물과 함께 읽었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계획 없이 몇 마디 적어보기로 한다. 출발점은 여기다.
“본디 도道는 먹는 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