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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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은 기본적으로 약한 것을 잘라버리는 사회입니다. 강한 것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강함이나 약함이 과연 가치의 상하·우열을 나타내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같은 인간에게도 강함과 약함이 있으므로, 무엇으로 그 사람이 강한 사람인지 약한 사람인지 판단할까 하는 부분도 의문입니다.


질병 치료 이야기입니다. 생명에 관한 것이지 인간의 가치나 능력의 우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생명의 세계에는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면을 보더라도 차이가 있고 다릅니다. 강하고 약함에서 그 각각을 정확히 판단해, 약한 사람은 원기를 회복시켜 건강체가 되도록 치료해야 합니다. 건강체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문제도 있지만, 100년의 생을 살아가기 위한 강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 생명력을 되돌리는 것, 그것이 치료입니다. 생명이 강한 사람에게는 공격적인 스파르타식 치료를 하고, 생명이 약한 사람에게는 보강해주는 온정적인 치료를 해야 구제할 수 있습니다.(195-198쪽)



interviewer 쓰지 신이치와 interviewee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서로 어긋나는 장면이다. 전자는 사회과학적·보편적 개념 지평을 이끌어 오는데 후자는 단단하게 인문학적·개별적 개념을 고수한다. 이 어긋남은 후자의 불명확한 용어 사용에서 비롯한다.


우선, 인간의 가치·능력과 생명의 두 개념을 왜 그렇게 날카롭게 구분해야 하는지, 실제로 그 구분이 사회적으로 인용되고 있는지 성찰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생물학적, 그러니까 생명의 약자는 그대로 사회학적 약자인 현실을 몰각하고 있다.


질병 치료의 범주와 생명의 범주는 같지 않다. 질병 치료는 의학 범주에 속한다. 생명 범주는 의학보다 훨씬 더 큰 범주다. 생명의 강약 개념을 그대로 의학의 일부인 치료(, 사실 이 또한 정확하지 않으므로 바로잡으면, 진단) 개념으로 써서는 안 된다.


약한 사람은 원기를 회복시켜 건강체가 되도록 치료해야 합니다. 건강체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문제도 있지만, 100년의 생을 살아가기 위한 강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말에 따르자면 100년의 생을 살아가기 위한 강함을 지닌 건강체 사람은 치료 대상이 아니다. 도리어 강함은 기준이다. 이 기준에 못 미치는 약한 사람이 치료 대상이다. 그러나 바로 뒤에는 상반되는 말이 나온다.


생명이 강한 사람에게는 공격적인 스파르타식 치료를 하고, 생명이 약한 사람에게는 보강해주는 온정적인 치료를 해야 구제할 수 있습니다.


강함도 치료 대상이라는 것이다. 치료 대상인 강함을 강함이라 할 수 있을까? 강함이라는 말을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이겠지만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이 용어를 일관성 있게 다루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혼효가 일어난 것은 강약의 주어를 같은 생명이라 해버렸기 때문이다. 강약이 둘 다 치료 대상이려면 강의 주어가 생명이어서는 안 된다. 한의학은 전통적으로 이 문제를 사기邪氣실實 정기正氣허虛로 설명해왔다. 건강체 유지에 유해한 것이 들어찬 것을 실實한 병이라 하고, 건강체 유지에 유익한 것이 모자란 것을 허虛한 병이라 했다. 이렇게 풀면 상당 부분이 명쾌하게 해결된다. 정작 문제는 이로써도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기와 사기는 본디 그렇게 분리되어 존재하는 무엇인가? 그런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같은 물질이 오직 그 정도 차에 따라 정사로 나뉘거나, 둘 다 사기로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동적 평형 지점을 이탈하여 과다 또는 과소 분비되는 경우, 전자는 항진의 병, 후자는 저하의 병이 된다. 사실 이런 상황은 허실 개념으로도 강약 개념으로도 포착할 수 없다.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강약 개념을 생명을 주어로 일관성 있게 사용하려면 강한 사람은 치료 대상이 아니고 약한 사람만이 온정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쪽만을 선택해야 한다. 그 일관성이 개인을 넘어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 또한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이 당연한 논리는 생명과 가치를 분리하지 않는다.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이런 실패 또는 한계는 재삼 말하거니와 종자논리를 성찰하지 않은 데서 온다. 종자논리를 성찰하지 않는 부주의는 나름대로 거둔 단단한 성공에 터한다. 성공이 단단할수록, 그러니까 대박일수록 인간은 안와전두엽이 손상된 사람처럼 사유하고 행동한다. 대박의 신자가 된 거다. 아니 환자가 된 거다. 결국 진부한 곳으로 돌아간다. 대박을 만나거든 대박을 베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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