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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평점 :
교조가 생겨나는 시점에서 사람의 길과 종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납니다. 신자를 끌어 모아 늘리면 안 됩니다. 교단을 유지하는 일에 비중을 기울이면 안 됩니다. 진실을 가르쳐 이끌고 진정한 자립으로 내보내는 것이 종교인의 역할입니다.·······교조라는 말을 사용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교조가 되어야 합니다.·······
석가는 교단을 조직하지 않았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석가는 제자를 깨닫게 해서 돌려보내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점점 제자들이 늘어나 대집단 대이동의 설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각각의 무대, 각각의 길로 내보내야 합니다.(171-172쪽)
마음 치유를 하면서 맞닥뜨리는 아뜩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 아픈 사람은 조금씩이나마 변하는데 그를 그렇게 만든 삶의 조건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매번 같은 조건 속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아픈 사람은 견디지 못 하고 도로 주저앉은 상태로 온다. 반복된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치유는 조건, 특히 요지부동인 주위 사람들을 대하는 다양한 방법, 심지어 싸우는 기술까지 익히는 전방위인문치유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갈등이 일어난다. 주위 사람들은 환자를 비난한다. 나아지라 보냈더니 더 못돼져서 돌아왔다고. 결국 비난은 내게로 귀착된다. 고치라고 보냈더니 더 망가뜨려 보냈다고. 사실 주위 사람들이 바라는 바는 하나다. 신경 안 쓰게 해달라는 거다. 그에 맞서려면 치유연대는 불가피하다. 치유연대는 자립을 가로막는 교단이 아니다. 교단이라면 주위 사람들이 바로 교단이다. 그 힘을 직면하기 위한 최소한의 어깨동무가 치유연대다.
이치로 따지면 자연농 자체가 치유연대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벼 자연농을 이렇게 말했다.
“자연 그대로 맡기는 것이 아니라 벼가 다른 풀에 지지 않도록 조금 손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자연 그대로 그냥 맡겨버리면 그것은 채집 상태일 뿐이기 때문에·······목적으로 하는 벼가 지지 않도록 적기에 적확하게 손을 빌려주고, 나중에는 맡깁니다.”(150쪽)
질 수밖에 없는 환자를 조건에 그냥 맡겨버리면 치유 이전 상태로 돌려놓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환자와 연대하는 이치는 자연농에서 농부가 벼와 연대하는 바로 그 이치다. 농부가 벼와 연대하는 이치는 농부가 농부와 연대하는 바로 그 이치다. 여기가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맹점이다.
왜 이 맹점이 생겼을까? 강고한 당시 카스트제도, 왕정 등의 사회 조건을 고려하면 공화주의 평등공동체인 석가의 승단은 불가피한 최소 연대였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이런 지식의 결핍은 그에게서 사회학적 상상력이 자라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지식과 상상력의 문제 이전에 종자논리의 문제다. 자신의 종자논리를 말갛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가와구치 요시카즈 같은 각자조차도 자신이 서 있는 경계의 땅이 얼마나 빛나는 자리인지 알 수 없었던 거다. 실로 허탈하고 어쩌면 무서운 일이다.
자연농이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맡기되 양육 과정에서 생명을 돌보듯 마음치유 또한 이치에 맞게 스스로 살아가도록 맡기되 숙의를 통해 아픈 사람을 돌본다. 이 돌봄의 과정과 시간을 촘촘히 챙기지 않고 자립, 각자 교조를 거론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섣부르다. 오늘도 나는 마음 치유의 도상에 선다. 나는, 나와 마주앉은 아픈 사람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