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 자연농의 대가와 문화인류학자가 담담하게 나누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생명의 길
쓰지 신이치.가와구치 요시카즈 지음, 임경택 옮김 / 눌민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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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하나”, “전체”라는 말에 대해서인데,·······‘총체적인“이라는 말과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부분 모두를 끌어 모은 것을 전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158쪽)


“불이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현상적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가 본질적으로는 하나고 일체라는 것입니다.


두 개가 있지만 분리할 수 없는 하나. 또는 하나면서 구별하면 두 개.(159쪽)




최근 들어 나는 “종자논리”란 말을 스스로 만들어 쓰고 있다. 이 말은 내가 터할 사유 틀을 구축하려고 애써온 40여 년 세월 동안 겪은 고뇌를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뜨르르한 지식인의 글을 읽고 배우면서 남곤 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그 내용의 탁월함에 놀라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끝내 허탈해했던 이유를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특히 서구 유학파들의 글에는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그 허술함을 뭐라 해야 할까. 바로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 내가 생각해낸 것이 다름 아닌 종자논리란 말이었다.


종자논리는 사유의 나무로 자라 실천의 열매로 맺히게 될 씨앗인 이치다. 이 종자논리를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길은 사뭇 달라진다. 물론 끝내 자신의 종자논리가 무엇인지, 어디에 구멍이 났는지 모른 채 고급 지식인 행세를 하며 살다 가는 사람도 있다. 아니, 많다. 이 단호함의 근거는 다름 아닌 그들의 글이고 삶이다. 치명적인 예가 바로 라캉이다.


종자논리라고 해서 무슨 특이하고 별스러운 것이 아니다. 가령 가와구치 요시카즈가 말한바 “두 개가 있지만 분리할 수 없는 하나. 또는 하나면서 구별하면 두 개.” 그러니까 불이불일不二不一 같은 것이다. 동아시아 종자논리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아는 사람도 그 요체 파악에서 보이는 다른 결은 실로 백인백색이다. 완벽하냐는 문제가 안 된다. 매순간 성찰하느냐가 문제다.


불이불일은 전체와 부분(정확히는 개체)의 명제와 결국 같은 것이다. 전체성을 확보하려면 부분의 총합을 넘어서야 한다. 부분의 총합을 넘어서려면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창조되는 경이가 필수불가결하다. 경이를 창조하려면 완전히 쪼개지지도 않고不二 완전히 포개지지도 않는不一 거래를 해야 한다. 이 거래를 일러 화쟁이라 한다. 화쟁하면 일즉다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세계가 열린다. 라캉과 그 아류는 결코 갈 수 없는 길이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는 어떤가. 不二不一, 一卽多 多卽一이란 종자논리를 구사하는 과정에서 ‘사무라이’의 냉기가 흐른다. 그 냉기로는 화쟁의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어렵다. 화쟁이 이룩하는 화엄의 전체성에는 온기가 향 맑게 흐른다.


“총체적”은 “전체”를 의미하는 “whole”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whole”은 건강을 의미하는 “health”나 치유를 의미하는 “healing”의 “heal”과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200쪽)


화엄은 치유다. 치유를 입에 올리면서 냉기를 배설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종자논리부터 확인할 일이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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