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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
카렌 암스트롱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식의 추구는 신명나는 일이며, 과학과 의학 그리고 기술은 인류의 삶을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하지만 무지는 여전히 인간 조건의 필수 사항으로 남아 있다.(146-147쪽)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은 ‘듣는 사람을 의문과 불확실성으로 빠뜨리는 질문’이·······다.(150쪽)
우리는 흔히 ‘모른다.’를 ‘알지 못한다.’로 새겨 부정어 취급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디 ‘모른다.’에서 출발해 길을 떠난다[如如only don't know]. ‘모르지 않는다.’고 부정하면서 ‘안다.’의 세계로 진입한다[無如]. 아무리 ‘안다.’의 세계를 헤매어도 ‘모른다.’는 상태가 해소되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안다.’와 ‘모른다.’의 차별이 없는 세계에 다다른다[一如]. 결국 ‘모른다.’에 내맡긴 채 걸림 없이 살아간다[卽如only go straight]. 이렇게 살아감으로써만 진실의 세계를 연다. 아니 오직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실의 세계 그 자체다[卽如是如如].
작년 이맘때쯤 <숭산선사崇山禪師 사여四如 일소一疏>라는 제목으로 서재에 올린 글이다. 아주 조금만 더 친절하게 되새겨보기로 한다.
통속한 관념과 정반대로 인간은 본디 ‘모른다.’는 상태를 긍정적 조건으로 하여 삶을 시작한다. ‘안다.’가 ‘모른다.’의 부정, 그러니까 ‘모르지 않는다.’다. ‘안다.’를 아무리 극한으로 밀어붙여도 ‘모른다.’ 상태가 없어지지 않는다. ‘모른다.’가 무한이기 때문이다. 설혹 ‘모른다.’의 절반을 ‘안다.’로 채워도 ∞/2는 ∞이므로 달라지지 않는다. ‘안다.’의 빛으로 ‘모른다.’의 어둠을 밝혀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모른다.’의 어둠이 ‘안다.’의 빛을 한계 지을 따름이다. 어둠이 짓는 한계 안에서 빛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어둠에 내맡긴 채 찰나마다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다. ‘안다.’로 내딛는 것이 아니다. ‘모른다.’로 의문을 지닌 채 불확실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질문으로서 살아가는 숙명이 인간의 절대 조건이다. 인간의 절대 조건이 사랑인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은 다른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는 것·······(158쪽)
·······저마다의 신비한 불가사의를 인식한다.(159쪽)
‘사랑한다.’는 ‘모른다.’에서 출발하는 삶의 고갱이다. 사랑은 모르는 절대 타자가 지닌 신비한 불가사의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치상 모든 사랑은 실패다. 끝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사랑이 사랑스럽다. 의문은 부단하다. 사랑스럽다. 불확실성은 영원하다. 사랑스럽다.
인간사 어느 시공에서 의문과 불확실성을 혐오하는 타락이 일어난다. 확신과 확실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사랑은 소유와 집착으로 영락해간다. 마침내 사랑은 폭력의 미명이 된다. 미명의 알리바이만 남은 타락한 정치, 타락한 경제, 타락한 종교의 삼각동맹이 바야흐로 정점에 이르고 있다. 박근혜의 사랑, 이재용의 사랑, 조용기의 사랑은 확신의 태극기와 확실의 성조기를 몸에 두르고 몽둥이를 든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고 고함친다. 계엄만이 길이라고 선동한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에 확신과 확실의 종이 된 가엾은 저들의 준동으로 사랑은 다시없이 더럽혀진다.
3월혁명의 날인 어제, 오염은 극에 달했다. 일제에 항거해 피눈물로 들었던 혁명의 태극기를 매판독재분단의 종자들은 일장기처럼 흔들어댔다. 비 때문이 아니라, 무지의 무지가 빚어내는 광기로 스러져가는 인간 군상을 생각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행진하는 내내 가슴이 눅눅했다. 눅눅해진 가슴으로 묻고 또 물었다. “나는 과연 내 무지를 알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