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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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8편 5~6절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신이 인간을 신처럼 창조했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사람의 발아   래 두셨습니다.


  히브리어 성서에서 인간은·······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죄인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많은 한글 성서나 영어 성서에서는 이 구절이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로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어쩌다 ‘천사’로 둔갑한 것일까?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과 인간에 대한 사고 안에서 ‘의도적인 오역’이 일어난 것이다.(19-20쪽)


수많은 사회문제를 일으켜 ‘개독교’라 불리는 통속한 주류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교리적 원인은 바로 원죄설입니다. 원죄설은 기독교도를 피학적·노예적인 사유·행동 프레임에 가두었습니다. 스스로 학대하는 노예는 불의한 권력·부도덕한 교권에 무조건 굴종합니다. 굴종의 인습은 거대한 수탈문명의 비겁한 후원체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후원의 대가로 떨어지는 떡고물에 배가 부르자 그들에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위대한 인간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장담컨대 ‘개독교’가 내부혁명으로 환골탈태할 가능성은 날아가는 새의 똥에 맞을 확률보다 낮습니다.


덧없는 시간 속에서 흐르듯 잊히고 마는 인간임에도 신이 기억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에 심어져 있는 신의 “영광과 존귀”, 그러니까 장엄의 빛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뒤집어 보겠습니다. 자신보다 조금 나은 신을 사유하고 행동함으로써 인간은 존재의 장엄을 복원해갑니다. 존재의 장엄으로 나아가는 인간이 자기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사건이 바로 신입니다. 사건인 신은 부동불변의 실체가 아닌 역동적 변화과정입니다. 변화의 찰나마다 장엄은 섬광으로 나타납니다. 섬광장엄은 부동불변의 풍경화로 그릴 수 없습니다. 변화의 결마다 달리 드러나는 경이의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기억하는 인간은 스스로 경계를 무너뜨릴 때 나타나는 섬광장엄뿐만이 아닙니다. 섬광장엄이 나타날 때 찰나마다 죽는 자아, 그 또한 신의 기억에 남습니다. 자아의 죽음은 비대칭의 대칭으로 이루어집니다. 자기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거대한 균열을 내는 폭발적 번짐과 소미한 틈을 내는 은근한 스밈의 쌍방향으로 일어납니다. 전자는 알량한 에고를 부수는 거친 동력입니다. 후자는 망상적 에고를 녹이는 부드러운 접촉입니다. 터져서 죽으나 녹아서 죽으나 죽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죽는 인간과 장엄으로 빛나는 인간 사이가 신의 기억입니다. 신의 기억은 참 인간에서 발원합니다.


어제 애제자의 페이스북을 통해 #1111이 안산 세월호합동분향소 번호이며 여기로 문자를 보내면 분향소 전광판에 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통신3사 모두 무료인데 아는 시민이 많지 않아 하루 다섯 통도 문자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소식까지 듣고 안 되겠다 싶어 본디 글을 조금 다듬어 제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트위터리안의 반응이 놀라웠습니다. 오늘 오후 5시 30분 현재 12만 5천 명 이상이 읽고 3천여 번의 리트윗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분향소 전광판에 뜨는 우리의 문자가 바로 신의 기억입니다. 신의 기억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죽음과 장엄이 우리를 인간다운 인간이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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