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산과의사 - 개정판
미셀 오당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 이른 아침, 오십이 채 되지 않은 애제자 하나에게 말기종양이란 객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대학생일 때 만나 이십오 년 넘게 인연 지어온 사이인 만큼 새삼 무슨 생각이 드는 것도, 무슨 말이 떠오르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통화를 했습니다.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습니다.


“쌤, 제가 본질적 예수쟁이잖아요. 마음 편합니다.”


저는 살짝 바꾸어 맞장구 쳐주었습니다.


“그래, 너 근본적 예수쟁이지.”


애써 예리하게 서로 차이 낼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 언어 감각에서 ‘본질’은 타고난 숙명의 냄새가 나고 ‘근본’은 천명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의 냄새가 나기에 그리 바꾼 것입니다. 하여 그의 음성에 공현을 일으키는 제 음성에 찰나마다 결절이 맺혔습니다.


스스로 인정하듯 그는 무한히 참고 견디고 받아들이는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지 않자 몸에 십자가가 지워진 것입니다. 지난 삶의 빛으로 오늘 그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서 이는 비단 개인의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불에 덴 듯 깨닫게 됩니다. 우리사회 전반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한히 협박하고 속이고 때리고 빼앗고 죽이는 권력을 무한히 참고 견디고 받아들이는 대한민국 백성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가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입니까.


제대로 된 눈으로 지금 현실을 보면 우리사회는 물론 인류사회 전체가 어떤 근본적 지점을 향해 돌진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권력과 자본, 그리고 종교가 공통적인 광기에 휩싸여 서로 부추기며 달리고 있습니다. 이 질주를 멈추게 하려면 저들의 통속한 강력과는 전혀 다른 공감의 약력을 써야 합니다. 산업 문명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관통하는 단도직입의 근본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가장 급진적입니다.


가장 급진적인 것은 딱딱하고 뻣뻣하고 크고 분명하지 않습니다. 말랑말랑하고 낭창낭창하고 작고 모호합니다. 말랑말랑하고 낭창낭창하고 작고 모호한 감각으로 말로 몸으로 마음으로 삶으로 연대로 하는 혁명이 농투성이 혁명이며 어미 혁명입니다. 소미심심小微沁心의 혁명입니다.


농투성이 혁명은 좁쌀 한 알, 굼벵이 한 마리 , 아니 흙 한 줌의 혁명입니다. 어미 혁명은 ‘다른 세상’의 욕 한 마디, 옥시토신 한 방울, 아기 눈동자 하나의 혁명입니다. 이것이 장엄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미타 정토입니다. 소미심심小微沁心의 영성 없이는 오지 않을 꿈입니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