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산과의사 - 개정판
미셀 오당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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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양들이 새끼를 낳을 때 에피듀럴 마취제를 주면 그 양들은 자기 새끼들을 돌보지 않는다·······.(83쪽)


  최근까지 여성은 사랑의 호르몬이라는 복잡한 혼합물질을 분비하지 않고선 어머니가 될 수 없었다. 오늘날 산업적 출산의 현재 단계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 호르몬 복합물질에 의지하지 않고 아기를 낳는다. 어떤 이들은 진통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정을 하여 제왕절개수술을 받는다. 다른 이들은 호르몬 대체 물질(보통 합성 옥시토신에 에피듀럴 마취제를 더해서)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자연적 호르몬 분비를 막는다. 약물을 주입받지 않고 아기를 낳는 사람들조차 흔히 모자관계의 결정적 순간에 후산을 위한 약물을 받는다. 합성 옥시토신 주사는 뇌혈관장벽(BBB)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이처럼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는 산과 관행이 불러일으키는 문제들은 문명의 관점에서 제기되어야 마땅하다.(85쪽)


의학은 도학과 공학, 두 극의 경계에 서 있는 중도의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제 개인적 소신입니다. 그런데 현대의학은 이미 공학에 투항하여 산업화 극단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공학은 인간과 자연 모두를 착취하는 거대한 권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공학 독재의 세상에서 기존의 도학은 더 이상 인간과 자연을 정화하는 향기로 번져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도학의 도래를 준비하며 병든 인간과 자연을 치유하는 각성된 의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의사의 각성은 참으로 무망한 일입니다. 산업적 의료의 부속품으로 안주하는 노예적 삶에 영혼을 팔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망 양상’과 ‘사망 원인’의 차이를 모를 리 없는 베테랑 의사가 백남기 선생의 사망진단서를 사실에 반하여 작성해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분명히 압니다. 그럼에도 권력과 돈 앞에서 양심을 저버립니다. 그가 특별히 악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다른 의사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산과 의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산과 의사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어서 인류의 미래를 살해하는 산업적 출산에 의도적으로 뛰어든 것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배운 대로 심상히 제왕절개수술을 시행하고, 관행대로 심상히 인공 합성 호르몬 대체물질을 투입합니다. 구조의 일상적 작동 전반에 악이 편만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가차 없이 그 범죄적 진면모를 드러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 스스로의 힘으로 각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무섭고 절망적입니다. 한 사람의 막지莫知와 탕욕蕩慾 앞에서 나라가 이렇게 삽시간에 통째로 주저앉는 꼴을 보면 대한민국은 건강한 사회 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형성조차 되지 않은 상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실을 정색하고 직시한 시민 공동체가 일어나 그야말로 “독립운동”을 이끌고 그야말로 “민주공화국” 세워야 할 때입니다.


허위사망진단서 사건은 부도덕한 권력이 일으킨 정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부도덕한 권력이 죽인 백남기 선생이 산업적 영농을 반대한 올곧은 농부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또한 문명의 문제입니다.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는 산과적 관행”은 타락한 “문명”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타락한 문명이 생명을 거대한 죽임증후군으로 내몬다는 면에서 이 사태는 또한 정치 문제입니다. 의사醫師가 의사義士이며 의사儀司이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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