눕기의 기술 -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
베른트 브루너 지음, 유영미 옮김 / 현암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책이 있습니다. 읽지 않았으나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제 인생 경전 제1장 제1절에 기록된 말 또한 ‘태초에 걸음이 있었다.’이기 때문입니다. 걸으면 산다, 아니 살아남기 위하여 걸어야 한다고 느낀 0세짜리 아기는 혼신의 힘을 다한 끝에 5개월이 지나면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이 지나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아기들에 비해 8-10개월 빨리 걸었고, 18-30개월 빨리 뛰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8주 이상 엄마 젖을 전혀 먹을 수 없는 죽음의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나타낸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환갑 나이인 지금도 걷고 또 걷습니다. 한 해 줄잡아 2천 킬로에 달합니다.


그렇습니다. 걸으면 삽니다. 걸어야만 삽니다. 무엇보다 병들어 한사코 누우려 하는 사람은 한사코 일어나 걸어야 삽니다. 고통에 깊이 잠길수록 병든 사람은 그 고통의 노예가 됩니다. 노예적 삶이 깊어질수록 고통에 충성합니다. 충성심은 마침내 고통을 즐기고 노예를 자랑하게 만듭니다. 중독입니다. 중독의 벽에 틈을 내는 것, 이것이 다름 아닌 걷기입니다. 걷기는 트기입니다. 트고 또 트면 탁 트입니다. 탁 트임이 곧 치유입니다. 이 이치를 누가 거부할 것입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걸어야만 산다는 절박한 당위는 이미 누울 만큼 누워 있었다는, 아니 지나치게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것이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의 맥락입니다. 우리 삶에는 전혀 다른 맥락이 존재합니다. 이미 걸을 만큼 걷고 있다는, 아니 지나치게 걷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맥락일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누우면 살고 걸으면 죽는다.”


베른트 브루너 『눕기의 기술』은 이런 맥락 안에 있습니다. 저자가 책의 처음 부분에서 La génération vautrée(뒹구는 세대)를 언급한 것이나 마지막 부분에서 철학자 한병철을 언급한 것이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의 성과를 향해 누울 틈 없이 걷기만 하는 문명을 향한 가볍고 쾌활한 저항이 담긴 책입니다.


가볍고 쾌활하다는 제 표현은 그만한 연유를 지닙니다. 단도직입의 명쾌한 통찰과 진지한 문장으로 가득한 한병철의 책과는 전혀 다릅니다. 저자 자신이 뒹굴뒹굴하며 집필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드러납니다. 다양한 역사적 예들로 즐비한 눕기의 면모, 침대를 포함한 기구 이야기는 흥미롭긴 해도 애써 번역해 지구 반대편 사람들까지 독자로 품기에는 다소 뭣한 내용입니다. 독일 저자들이 드물지 않게 찔러오는 허입니다. 한병철이 썼다면 이 책은 30쪽을 넘지 못했을 듯합니다. 당초에 파악한 의도대로 제가 글을 썼다면 10쪽으로 압축했을 것이고, 여기에 의학과 정치경제학 이야기를 결합해 50쪽쯤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대략 이렇게 추려서 뒹굴뒹굴 읽으면 제격이지 싶습니다.


일단 첫 세 문장이 상큼합니다.


지금 누워 있는가? 그렇다면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나 눕지 않을 수 없고, 종종 간절히 눕고 싶어지니 말이다.(9쪽)


아, 이 밀도대로 쭉 글을 썼다면 실로 탱탱한 걸작 하나 나왔을 법한데 말입니다. 바로 그 뒤부터 서서히 드문드문해집니다. 그래도 거의 오류에 해당하는 역사적 에피소드가 줄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실한 표현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가령,


눕기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생리적이고 심리적이며 창조적인 면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시간 관리와 삶의 속도에 대한 심오한 문화적 주제들과 맞닿아 있다.(11-12쪽)


이런 포괄적 통찰 같은 것 말입니다. 물론 그 뒤 ‘심오한’ 이야기들이 그다지 나오지 않아 허탈하긴 합니다. 심오한 이야길랑 저를 포함한 독자들의 몫이니 필요한 곳에서 행간을 추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단, <수평적인 자세의 문법>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은 세계 진실의 비대칭적 대칭성을 드러내고 현 문명이 어느덧 망각해버린 수평의 근원적 중요성을 돋을새김 해준다는 점에서 그 톡톡함이 상당합니다.


눕기와 걷기(혹은 뛰기)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이 둘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표면을 기준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향은 두 가지다. 수직 방향과 수평 방향이 그것이다.·······

우리는 누운 자세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누운 자세로 할 수 있는 일은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인간 상태의 전 영역을 포괄한다. 나아가 인간의 삶도 누워서 시작되고 누워서 끝난다.·······공쿠르 형제는 작가가 완수해야 하는 (그리고 대부분 누워서 완수하는) “인생의 세 가지 위대한 행위”를 “탄생, 성교, 죽음”이라 했다.(14-16쪽)


엄밀하게 따지면 눕기와 걷기는 수평과 수직으로 대칭시키면 안 됩니다. 수평으로 눕고 수평으로 걷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가, 아닌가도 수평과 수직의 대칭이 아닙니다. 누워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전혀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서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평과 수직으로 대칭시키는 사유는 눕기와 서기의 몸 상태 그 자체에서 비롯합니다. 그것이 각각 지니고 있는 개인적 삶의 선택과 문명적 의미 때문에 대립각이 세워집니다. 눕기는 자본주의 성과사회에서 쓸모없는 나태와 병약함을 의미합니다. 서기는 걷거나 뛰기를 아우르는 자세로서 자본주의 성과사회에 충실히 복무하는 부산스러움을 의미합니다. 하여 눕는 자는 looser로 낙인찍힙니다. 걷는 자는 winner로 떠받들립니다. 우리는 익히 경험한 바 있습니다. 세상은 looser 아닌 winner가 망가뜨린다는 사실 말입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최악의, 최후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멸망으로 질주하고 있는 이 세상은 그러므로 눕는 자가 구원해낼 것입니다. 눕는 자는 오로지 태어나서 성교하고 죽는 일을 숭고하게 완수함으로써 생명과 세계를 지켜낼 것입니다. 숭고한 탄생은 무엇일까요? 숭고한 성교는 무엇일까요? 숭고한 죽음은 무엇일까요? 이 세 질문에 대한 묵상과 실천, 그러니까 눕는 자의 천명을 어떻게 마주하는가에 따라 인류와 세계의 존망은 갈라질 것입니다.


저로서는 어떤 취지로 공쿠르 형제가 이 셋을 말했는지 알 수 없으되 여기에서 왜 잠을 제외했는지 더욱 알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니체의 말을 인용하고 그 중요성을 말했다시피,


“잠자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자기 위해 온종일 깨어 있어야 하니 말이다.”

눕기와 잠들기는 서고, 걷고, 앉아 있는 등 다른 모든 활동을 하기 위한 단순한 준비 동작 이상의 일(63쪽)


입니다. 다분히 수사적이지만 잠과 깨어 있음의 기우뚱한 대칭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말은 신랄합니다. 깨어 있으려고 잠자는 것이 아니라 잠자려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걷고 난 뒤에 잠자는 것이 아니라 잠잔 뒤에 걷는 것입니다. 결국 삶은 잠에 터하고 잠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잠은 눕기 내러티브에서도 치명적 중요성을 지닌 것입니다. 이런 잠에 대하여 조금 더 썼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 와중에 이 책은 두 가지 생각꺼리를 제공해줍니다.


하나는,


잠들기 전과 깨어난 직후는 많은 사람들에게 독특한 지각장애가 나타나는 시간이다.(69쪽)


입니다. 이 경험은 거의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이 책 내용을 다시 들출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겠습니다. 누웠으나 잠들지 않은 짧은 시간, 잠에서 깨었으나 일어나지 않은 짧은 시간이 ‘직후’ 단계를 넘어서면 우리에게는 대칭적인 경험이 찾아듭니다. 우선 지각장애가 걷히면 그 즉시 불안이 드리워집니다. 이 시간대는 외부 조건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상태이므로 가장 위험합니다. 그 위험에 대비할 수 있게 진화적으로 적응한 결과가 이른바 기저불안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루 중 가장 자기수용적인 때가 바로 이 두 시간대입니다. 지난 하루와 오는 하루를 마음에 가득 담아 인정하고 소망하는 이 자기수용은 얼핏 보면 기저불안과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기 삶에 감응하여 곡진히 살아가려는 그것 말입니다. 저자는 이 비대칭의 대칭을 놓쳤습니다.


다른 하나는,


도중에 잠이 끊이지 않도록 한꺼번에 죽 몰아서 자는 소위 ‘모노블록monobloc’ 형태의 수면은 현대의 노동 분업 사회로 인해 탄생한 상대적으로 새로운 습관이다.(73쪽)


입니다. 정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사실 그 동안 평균 90분을 한 주기로 하는 잠을 적어도 4주기 내쳐 자는 것을 건강한 수면의 기준으로 삼아 진단하고 두잠자기를 포함해 자주 깨는 것을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표지, 심지어 병적인 상태로 규정해왔습니다. 저를 포함해 제게 오는 환우들이 거의 대부분 현대의 노동 분업 사회를 살아가고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그다지 잘못된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이 문제는 의자醫者인 제게 중요한 화두임에 틀림없습니다. “과연 어떤 잠이 가장 생명다운 것일까?”


여기 이후 <아직도 누워 있는가?>에 이를 때까지, 이 책은 찰방거리는 수준의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채워집니다. 곧장 그 맨 마지막 장으로 달려가도 무방할 듯합니다.


눕기, 앉기, 걷기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까?·······분주한 스케줄에 대한 반감이 대두되고 시간 관리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요즘, 한국 출신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사색적인 삶을 다시금 활성화하고, 삶이 “순간적인 현재의 단순한 나열로 와해되는 것을 막으려면” “머묾의 기술”이 필요하다 했는데 이런 차원에서 눕기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도 있을 터다.·······바야흐로 신 수평(New Horizontal) 시대가 도래한 듯한 느낌이 든다.(204-205쪽)


이를테면 신 수평의 시대를 문명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해한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여기에 이 부분을 더하면 수긍이 갑니다.


·······눕기의 기술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눕기의 기술은 다른 기술들과 불가분하게 연결하여 구사해야 한다. 무위의 기술, 겸손의 기술, 누림의 기술, 휴식의 기술, 또한 그 유명한 사랑의 기술과 말이다.(206쪽)


눕기가 무위·누림·휴식·사랑과 연결된다는 것은 현 문명 전체와 전방위로 맞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저자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던 듯합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눕기의 기술』이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화두 하나 받은 것만으로도 고맙지만 물론 저라면 이렇게 책을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눕기에서 번져가는 문명적 의미들 가운데 의학과 정치경제학의 내용을 돋을새김으로 “수평 방향의 어법”(206쪽)을 구성하고 “누움의 미학”(206쪽)을 차별화했을 것입니다. 누워서 느릿느릿 그 글쓰기를 제 삶의 흐름에다 맡겨볼까 합니다. 책 이름은 『누우면 살고 걸으면 죽는다』,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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