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처음 『중용』 공부의 계기가 되었던 제 딸은 현재 대학생입니다. 아비와 함께,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낯선 촛불 광장과 거리에 섰던, 중학생의 그 마음, 공부에 파묻혀 지낸 고등학생의 그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지,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딸도 제 아비가 어떤 아픔을 지니고 있는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다 알 수는 없겠지요. 서로 상대방을 다 알지 못 하는 그 틈새에서 새로운 삶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물론 그 전부터 이미 저희 부녀는 명시적이지 않았을 뿐 조금씩 이런 유형의 대화를 나누어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자식이 다 하는 일상적이고 수직적인 대화가 아닌, 특별하고 수평적인 대화, 곧 평등한 인격체로서 삶과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말입니다. 대개 훈계와 관리 차원에 머무르는 “무심코” 식 대화에서 놓여나 쌍방향으로 진실을 소통시키는 “유심히” 식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딸이 대학생이 된 직후,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 대화를 정식으로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 대화를 “제2채널the second channel”라 이름 지었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 제2채널은 필수적입니다. “무심코” 자행되는 정복과 지배, 그리고 수탈 행위에서 생명을 지켜내려면 “유심히” 이 평등한 소통 행위를 복원시켜야 합니다. 권력, 돈, 지식을 독점한 극소수의 탐욕이 대다수를 공포와 무지의 노예로 만들어 모두를 황폐하게 하고 있는 세상이 바뀌려면, 피할 수 없는 아픔을 함께 나누어 서로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해방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제2채널이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 제2채널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공간입니다. 제1채널 체제를 믿고 “가만히 있으라.” 해서 가만히 있었던 아이들이 무참히 죽어간 세월호사건은 이에 대한 웅변적 증거입니다.


세월호사건은 권력과 자본, 그리고 종교가 제1채널체제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천문학적 부를 축적해온 과정의 거대한 결절점입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매판독재분단세력이 빼돌린 국민의 돈이 스위스비밀은행에 980조, 버진아일랜드 등 이른바 조세피난처에 870조, 도합 1850조라고 합니다.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3위 수준입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많은 국민은 제1채널을 통해 온갖 수탈을 당하면서도 그게 애국애족의 길이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글이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대한민국 매판독재분단세력은 세월호사건에서 그랬듯 일방적으로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일방적으로 테러방지법 제정을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필사적으로 필리버스터 행렬을 이어가고 시민 필리버스터로 번져가는 동안 ‘존엄’은 공식석상에서 책상을 내려치며 격노하는 모습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총선 국면에 접어들어서는 ‘국회심판’ 운운하는가 하면, 붉은 옷을 입고 전국을 누비며 반 헌법적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진두지휘 아래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결과는 경천동지. 그 동안 그가 자행해온 저강도 쿠데타에 맞서 시민이 고요한 혁명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후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구체적인 심판에 착수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분명히 하면 됩니다. 심판은 세월호사건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부터 명실상부한 제2채널을 열어야 합니다.


반중용의 폭거가 극에 달한 오늘 여기, 우리가 벼린 중용의 정신이야말로 시중時中하는 제2채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용은 평등한 쌍방향소통으로 이 불의한 사회를 자주·민주·통일로 나아가게 하는 인문전쟁 행동입니다. 『중용』을 읽는다는 것은 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생인 딸에게 제2채널을 통해 아비 아닌 동지가 되어야만 하는 삶의 조건을 나지막이 이야기하려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딸조차 전사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밖에 없어서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조금 덜 미안하고 조금 덜 부끄럽기 위한 짓은 아무래도 서투르기 일쑤일 것입니다. 이 또한 평생 걸머지고 가야 할 숙명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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