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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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의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72쪽)


구약성서 창세기 제1:1-2:3에는 신אלהיםElohim의 창조와 안식 설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이레째 날 안식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여기 신의 안식은 창조에 대한 만족, 그러니까 ‘보기에 좋았다’는 거듭되는 표현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의 깊은 피로가, 그 안식이 거룩한 까닭이 여기에 있으니 말입니다.


성과사회가 부추긴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신의 창조와 전혀 다릅니다. 한병철이 이미 말한 바입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신이 창조를 마치고 그 피로를 거룩한 안식으로 푼 논리는 성과사회가 몰고 온 탈진 피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성과사회가 몰고 온 탈진 피로는 성과 향상을 마치고 보기에 좋아서 거룩한 안식으로 태평히 누리는 깊은 피로가 아닙니다. 성과사회는 탈진 피로만을 가파르게 누적시키는, 보기에 나쁜 성과를 더욱 향상시키도록 여전히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깊은 피로, 거룩한 안식인 피로를 말하려면 그것이 단지 탈진 피로의 대립자라는 사실 적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가 어떻게 그 대립자를 삶의 실재로 만들어 나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한병철이 인용하는 한트케는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를 신뢰하는 사람, 놀이하는 아이, 오순절의 사람들 정도로 느슨한 주체에다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행위 양식을 제시합니다. 한병철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책의 전반을 통해 ‘주체’가 돋을새김 되지 않고 ‘사회(존재)’가 마치 생략된 주어 같은 느낌을 주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이런 느낌의 정점에 바로 창조주 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병철은 책의 끄트머리 바로 직전에 왜 신의 피로, 그 거룩한 안식을 (뜬금없이) 거론하였을까요? 성과사회 전체가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닐 텐데. 성과사회를 끌고 가는 지배집단이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더욱 아닐 텐데. 성과사회의 희생양으로 탈진 피로에 허덕거리는 소시민이 바로 그리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더더욱 아닐 텐데.


한 권의 철학서가 구체적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무엇을 어찌 해야 한다는 것까지 말할 의무는 없을지 모릅니다.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는 지침 제시만으로도 훌륭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못내 안타까운 까닭은 너무나 좋은 말이 아득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의 거룩한 안식과 구의역 청년의 치명적 노동 사이에 가로놓인 저 심연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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