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죔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사물들은 반짝이고 어른거리며 가장자리가 흔들린다. 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 “그런 근본적인 피로 속에서 사물은 결코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들과 함께 나타난다.·······결국은 모두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개별자들의 공동체·······(70-71쪽)


고립을 깨고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여기 깊은 피로가 탈진의 피로와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탈진의 피로처럼 구체적인 경험으로 구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자 역시 본문에서 깊은 피로의 작용을 반복적으로 말할 뿐 손에 잡히는 내용을 구성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대체 깊은 피로는 탈진 피로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대체 깊은 피로의 깊이란 무엇일까요?


탈진 피로는 말 그대로 에너지가 소진되고 허무감을 동반한 우울증으로 내몰리는 상태입니다.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한 질주를 멈추면 피로가 풀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심해집니다. 병적 상태에 순응하면서 증상을 익숙히 대하다가 치료로 방향을 바꾸면서 일어나는 각성이 불편한 감각을 날카롭게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피로의 양적 강도가 심화되는 것이 아니고 피로의 질적 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피로가 입자성에 파동성을 증폭시키는 과정에서 경직은 유연으로, 고립은 연대로, 폐쇄는 개방으로, 차별은 우애로, 개체는 공동체로 전환됩니다.


피로의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소속이나 친족관계는 해체됩니다. 그 대신 개별자, 그러니까 나‘들’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나‘들’의 공동체는 ‘우리’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고립이 극단이듯 ‘우리’의 공동체도 극단입니다. 나‘들’의 공동체는 양 극단을 놓은 중도, 그러니까 정도의 실천 양식입니다. 이것은 양비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화쟁입니다. 화쟁의 고단함이 낳은 야트막한 연대가 바로 무애세상입니다. 무애세상에서는 함께 어깨를 맞댄 나‘들’이 부정不定uncertainty의 삶을 구가합니다. 부정의 삶에는 성과가 부르는 피로가 없습니다. 놀이가 부르는 고단함이 있을 뿐입니다. 고단해서 향 맑을 뿐입니다.


딸이 저와 상담하는 60대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자신의 흠결 없음을 증명하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하고도 상세하게 딸이 처한 의학적 상황을 설명했고 ‘100% 신뢰한다.’는 반응을 얻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했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돌아가면 이전의 가족관계가 복원된다고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개별자, 그러니까 나‘들’의 공동체가 새로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