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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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53쪽)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참선은 변방이 되고자하는 연습입니다. 왜냐하면 주권은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권은 변방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변방으로 가면 ‘당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을 만나려고 나를 선두에 세워 변방으로 나아가는 연습이 참선, 참眞 선입니다. 나의 변방과 ‘당신들’의 변방이 만나는 곳이 참 중심입니다. 참 중심은 자기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空입니다. 공空은 공共입니다. 공共이 참 무위입니다.


2013년 5월 13일, 제가 이 서실에 올린 <참 나는 남에게 있다>라는 글입니다.



대승의 큰 지식이

참 나를 찾으라니

땡초는 나를 보고

중생은 남을 본다


천하시인 김선우의 <참나라니, 참나!>(『녹턴(문지, 2016)』수록)를 읽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슬의 역설이라 하옵지요.

비루를 덜기 위해 저잣거리를 떠났던 자이오나

참나의 환영에 속았음을 알게 됐습죠, 참나라니, 나참.

속았으니 냉큼 돌아올밖에.

마음 깊이건 영혼 끝이건

나를 초월한 어딘가에 있을 나를 찾아 영영 헤매라뇨, 참나,

먹지도 자지도 훼손되지도 않는 영롱한 참나의 이데아라뇨, 나참,

비루할지라도 당신,

당신들과의 접촉면에서 이슬이 맺히죠.

이슬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죠.

나 아닌 존재와 연결되어야만 내가 되는 영롱함,

나의 밤을 깊이 두드리면 내가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아침이

드물지만 오기도 합디다.

당신이 기쁠 때 왜 내가 반짝이는지 알게 되는

이슬의 시간,

닿았다 오면 슬픔이 명랑해지는

말갛게 애틋한 그런 하루가 좋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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