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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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50쪽)


우리말에서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어휘는 흔히 쓰는 것이 대략 430여개 정도이며, 그 중 72% 이상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상에서는 감정 어휘들을 대개 두루뭉술하게 씁니다. 건강한 사람한테야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감정에 상처입어 질병으로 자리 잡은 사람한테 이렇게 접힌 어휘 사용은 그 자체로 질병일 뿐만 아니라 질병을 더욱 깊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정확한 뜻과 섬세한 느낌을 되살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상담치료에서 마음 아픈 사람을 풍부하고 정확한 감정 표현으로 이끌어내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은 대부분 한두 가지 감정에 묶여 있고 나머지 것에는 아예 무감각하거나 모호한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때 치료자 자신이 풍부하고 정확한 어휘 역량을 갖추고 도와야 함은 물론입니다. 감정개념의 방을 만들고 거기에 느낌을 채워 넣는 일은 아픈 사람 혼자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 아픈 사람이 실생활에서 아주 많이 시달리는 감정 상태가 다름 아닌 짜증입니다. 짜증을 내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와 상관없이 저는 그 동안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짜증은 항복 선언입니다.”


대부분 이 말에 공감하거나 수긍하지 못하지만 짜증은 접힌, 아니 구겨진 감정입니다. 분노의 외양을 갖추지만 분노의 에너지는 처음부터 없습니다. 이미 체념한 상태에서 던져보는 투덜거림, 굴절된 신음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내면이 아이 상태에 있는 사람이거나 학대받은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찌꺼기 감정, 정확히는 감정의 찌꺼기입니다. 결국은 현실에 더 잘 순응하기 위한 위악적 추임새인 셈입니다. 짜증나서 총을 집어 들었다고 떠들어봐야 짜증은 길바닥에 뱉는 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총을 집어 들려면 분노로 총을 집어 들어야 합니다. 시를 쓰려면 분노로 시를 써야 합니다. 술을 마시려면 분노로 술을 마셔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려면 분노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의로우려면 분노로 의로워야 합니다. 분노, 이것이야말로 2014년 4월 16일 이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다듬어야 할 최우선의 감정입니다. 지금 우리가 분노를 어영부영 건너뛰면 나머지 모든 감정을 송두리째 탈취당할 것입니다. 분노의 칼날을 딛고 끝까지 발을 베이지 않은 채 이백 쉰 명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역사 현실로 불러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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