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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32쪽)
5월 23일 아침 한겨레신문 김영훈 기자의 <생각 줍기>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극대화하는 유일 종교이자 이념인 자본주의는 이미 거북이의 등껍질을 떼어버리게 했고, 물고기를 뭍에 오르게 했습니다. 통시적이든 공시적이든 인간의 탐욕, 더 정확히 수탈 체계는 벌써 통제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분주하고 부산한 삶으로 대박치는 사람의 ‘자뻑’ 활동이 힘과 돈을 그러모아 천년왕국의 꿈을 이루어나가고 있습니다. 온갖 토건을 일으키며 분주히 돌아다닌 CEO 빙의 ‘지도자’ 뒤를 이어 수백 벌의 옷을 갈아입으며 부산스레 돌아다니는 교주 빙의 ‘지도자’가 목하 새로운 경제를 창조한다며 훤화하지만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입니다.
휴먼스피드를 넘어서고 휴먼스케일을 벗어나면 신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이르는 것은 신의 경지가 아닙니다. 신의 느낌입니다. 전능감입니다. 전능감은 안와전두엽이 망가져 자기성찰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막무가내 자신감입니다. 위너가 지닌 맹독성 독선입니다. 위너의 독선은 기존 가치만을 재생하고 가속화함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생명력을 고갈시킵니다. 공동체 전체를 살리려면 쪽박 찬 민중의 “깊은 심심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깊은 심심함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깊은 심심함의 공간은 낮은 담장 아래 있습니다. “정신적 이완”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느릿느릿 낮은 담장 아래를 걸어서 육십갑자를 살았습니다. 대한민국 중산층 요건 여섯 가운데 단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 도정이었습니다. 거북이인 거북이로 등껍질 이고 가려 합니다. 물고기인 물고기로 뭍에 오르지 않고 살려 합니다. 이런 삶이 가져다주는 새로움, 경이로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쓰다듬어봅니다, 제 등껍질을. 가만히 손 흔들어봅니다, 제가 오르지 않은 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