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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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26-27쪽)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성과주체는·······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28-29쪽)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와 “주인이자 주권자이다.”는 상호모순입니다. 한병철은 알랭 에랭베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는 주권을 부정합니다. 반대로 <규율사회의 피안에서>라는 소제목 아래 있는 글을 마무리하는 바로 다음 문단에서는 주권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한병철의 논리적 실패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둘 중 하나만 맞을까요? 아닙니다. 둘 다 맞습니다. 한병철은 자기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논리적 실패를 통해 결과적으로 진실의 전경을 드러내 보인 셈입니다.


동질적 긍정성의 시대를 노동하는 성과주체가 스스로 열었다면 모순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노동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노동의 열매를 수탈하는 자들이 이 시대를 열었기 때문에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질적 긍정성은 실체적 진실이라기보다 수탈자들이 동원한 전략적 이미지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지로서 언어가 실재를 오염·타락시키는 상태입니다. 마치 현 정권이 원칙이라는 언어를 전유함으로써 원칙의 실재를 오염·타락시키는 것과 동일합니다.


동질적 긍정성은 동질적 긍정성이면서 동질적 긍정성이 아닙니다. 우울증 환자가 스스로를 착취함으로써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일치하게 되는 역설보다 이 역설이 더 근본적입니다. 이 역설이 우울증 역설의 원인이자 해결의 열쇠입니다. 이 역설의 인식과 실천을 누락시키면 우울증은 개인 문제로 환원되고 맙니다. 우울증은 정치경제학적인 문제입니다. 우울증에 입대는 사람은 자신이 공적 참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병철의 글은 모호해 보입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가족들의 몰이해입니다. 거의 예외 없이 귀책사유가 환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특히 부모의 미명으로 가해의 실재를 덮고 환자 스스로 우울증에 빠져들었다고 몰아버리거나, 설혹 가해 실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거를 붙들고 있는 것이 잘못이라고 다그칩니다. 일부러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면서 아이들이 철이 없어 못 나왔다고 말한 세월호사건 해경의 태도와 같습니다. 동질적 긍정성이란 교묘한 음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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