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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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를 서구와 모든 점에서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통일된 독일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냉전이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사회의 일반적 의식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 역시 성과사회이고 그에 다른 사회적 폐해와 정신질환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서구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6-7쪽)

 

『철학은 뿔이다』(북인더갭, 2016)라는 책이 있습니다. 헤겔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번역가이자 시인인 전대호가 쓴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집어 들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가 김상봉을 어떻게 비판하였는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왜 하필 헤겔인지 알고 싶어서입니다. 처음 것은 나중에 다른 기회를 통해서 직접 리뷰 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는 왜 하필 헤겔인가, 하는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대호는 자율과 책임을 이행하는 대화적 주체를 철학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의 이런 철학과 일치하는 철학이 다름 아닌 헤겔입니다. 헤겔을 방편으로 삼아 그는 자신의 사유를 펼칩니다. 이것을 그는 ‘나는 나의 헤겔을 끌어들일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 목소리를 낼 뿐이다.’라고 합니다. 제가 왜 하필 헤겔인가 하고 품은 의문은 그의 이 결정적 두 문장 사이에 있는 어긋남 또는 모순 때문입니다.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끌어들인 헤겔이 어떻게 내 목소리를 내는 나인가?”

 

이 땅의 잘못된 학문과 교육을 간파하고 이미 자신의 사유 근간을 확립했다는 그의 말에 터할 때, 스스로의 언어로 철학체계를 구축하면 되지 왜 구태여 ‘외부’로 나가 그것을 확인하고 돌아와서 헤겔을 방편으로 끌어들인다고 하고, 헤겔주의자라고까지 자처하는 것일까요? 전대호의 이런 말하기는 과연 그가 말한바 ‘제자리에서 말하기’가 맞는 것일까요? 그러면 헤겔은 누구를 방편으로 끌어들였으며 누구주의자였을까요?

 

조금 더 나아가겠습니다. 평범한 철학도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할 때, 대가나 거장에 기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저는 다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왜 하필 헤겔인가?”

 

이 질문의 핵심은 왜 그의 ‘외부’가 하필 서양인가입니다. 동아시아 전통도 아니고, 이 땅의 전통도 아니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옹호하는 근대성을 동아시아 전통이나 이 땅의 전통에서는 찾을 수 없어서였다면 이는 확실히 그의 실패일 것입니다. 그의 실패에는 다분히 그가 비판하는 ‘외부인 놀이’가 끼어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헤겔보다 천백여 년 앞서, 이 땅의 원효가 이미 근대성의 원리를 장쾌하게 펼쳐놓았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보편적 과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 해결의 출발점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과 그 공동체의 구체적인, 그러니까 특수한 현실입니다. 전대호를 읽으며 일어났던 의문이 한병철을 읽을 때에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한병철이 독일에서 독일어로 쓴 명쾌한 글을 한국인이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읽을 때 다가오는 낯설음은 다만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이 책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같은 시기에 첫 출판되었다면 한국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가 한국 사회가 서구 사회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냉전이 사회의식을 근본적으로 지배하지 않으며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사유 현실은 확실히 한국 아닌 서구, 독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지배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거니와 종북 프레임이 이 사회를 전방위적으로 망치고 있는 현실이 어떻게 근본적이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자기를 착취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어도 매판독재분단세력에게 표를 던지는지 궁금합니다. 식민지를 경험하고 신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는 준주변부 한국의 성과사회가 독일의 그것과 어떻게 같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세월호사건 뒤였다면 이 서문을 과연 어찌 썼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이미 한병철의 저작 『투명사회』, 『심리정치』리뷰 56편의 글을 적었습니다. 그의 글이 워낙 정확명징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주는 행복감은 대단합니다. 『피로사회』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 번 리뷰는 제가 좀 대립각을 세우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질병, 특히 마음병을 논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문학자이고 저는 의자醫者입니다. 배타적 구획은 저 또한 반대하지만, 임상 현실에 처한 저로서는 인문학적 접근의 폐단이 범람하는 현실을 어물쩍 넘어갈 수 없습니다. 까칠한 자세로 시작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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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6-05-12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대호가 `나는 나의 헤겔을 끌어들일 뿐이다`라고 말할 때, 방점은 `헤겔`보다 `나의`에 찍혀야 합니다. 전대호의 헤겔은 외부에 있는 객관적 헤겔이 아니라 전대호가 이해하고 소화한 헤겔입니다. 헤겔을 소에 비유하자면, 전대호의 헤겔이란 목장의 소나 정육점의 쇠고기가 아니라, 전대호가 이미 씹어서 삼키고 동화해서 이미 그의 몸이 된 헤겔입니다. 그런 헤겔을 방편으로 운용하는 것도 외부인 놀이일가요? 인용하신 두 문장 사이에 어긋남 혹은 모순이 있다는 평가를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bari_che 2016-05-12 14:22   좋아요 8 | URL
탁월한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 따릅니다. 쇠고기가 모두 소화되어 전대호의 몸이 되면 더 이상 소가 아닙니다. 헤겔이 모두 소화되어 전대호의 사상이 되면 더 이상 헤겔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대호는 지금 헤겔을 여전히 붙잡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소화가 덜 된 것이라면 아직 내 목소리가 아닙니다. 소화가 다 되었음에도 헤겔을 붙들고 있다면 이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생계의 문제입니다. 두 경우 모두 논전 아닌 실전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실전에서는 방점의 위치차가 무의미합니다. 막춤 못 추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 2016-05-1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철학자들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름난 선배를 들먹이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그 선배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그런 선배가 말하자면 이정표의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몹시 추상적인 철학의 세계를 탐험하다보면, 우선 철학자 본인이 자신의 자리를 확인할 필요가 절실해집니다. 그럴 때 이름난 선배들이 위치 확인용으로 매우 요긴합니다. 예컨대 나는 `헤겔과 칸트 사이의 중간쯤에 있다`라는 판단이 서면, 나 자신의 생각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죠. 자기 생각을 다른 철학자들에게 알리고 설명할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잘 아는 이정표들을 기준으로 삼아서 설명을 풀어나가면 매우 효율적입니다. 더구나 수준이 깊어지면, 그렇게 이정표들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논의를 진행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요컨대 이름난 선배를 들먹이는 것은,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 그러니까 결국 사상을 위해서입니다. 아마 전대호가 헤겔을 언급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일 겁니다.

bari_che 2016-05-19 14:32   좋아요 10 | URL
논점이 비틀어져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논의를 더 계속해야 하나 의문이 들어 고민하다가 다시 추슬러 말씀드리겠습니다.

외부에 나가 공부한 사람들이 그 현장에서 배운 내용과 감각으로 쓴 글을 여기 현장에서 배운 내용과 감각으로 읽을 때 드는 괴리감에 대한 언급이 이 이야기의 발단이었습니다. 전대호에 관한 언급은, 끌어들인 헤겔이 과연 전대호일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할 때 왜 하필 헤겔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반론하신 분은 쇠고기 비유를 들어 나의 헤겔과 내 목소리 사이에는 어긋남 또는 모순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비유를 그대로 받아들여 논점을 더 명료히 했습니다. 소화 흡수가 끝난 쇠고기는 더 이상 소가 아니듯 소화 흡수가 끝난 헤겔은 더 이상 헤겔이 아닐 텐데 계속 헤겔을 붙잡고 있는 것은 사상 아닌 생계 때문이 아닌가, 다시 물었습니다.

반론하신 분은 제 질문의 구체적 문맥을 넘어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철학자들이 선배 대가에 기대는 것은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고, 동료 철학자들에게 더 잘 설명하려 함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정도 내용이라면 이미 제가 인정한 바입니다. 이런 기댐을 제가 문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소화 흡수가 다 끝나 내 목소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헤겔이 전대호가 되었다, 따라서 양자 사이 어긋남이 없다고 말했으면서 왜 계속 헤겔을 ‘이정표’ 삼는가를 물은 것입니다. 이정표가 필요한 것은 여행자가 길을 모를 때입니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아직도 헤겔이라는 이정표가 필요한 전대호라면 그의 헤겔은 그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외부 목소리입니다. 정말 헤겔이 전대호임에도 전대호가 여전히 헤겔 이름을 들먹인다면 그 헤겔이라는 이름은 전대호의 신분증명서이거나 훈장일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생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반론하신 분은, 그렇다고 할 때 그게 왜 하필 헤겔인가를 물은 것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제 문제의식은 거기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효 이야기도 하고 한국 사회 특수성 이야기도 하면서 이 현장의 생명, 이 현장의 삶 문제를 풀기 위해 이 현장의 경험과 언어가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추측건대 반론하신 분에게는 아직 이 문제가 절실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반론하신 분의 응원은 전대호 본인에게 그다지 힘이 되지 못할 듯합니다.

끝으로, 반론하신 분이 말씀하신 ‘깊은 수준’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전대호의 책도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끝내주는, 뻐근함의 깊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산골로 들어오길 잘한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끝내주는, 뻐근함의 깊이에 계속 머무르는 산골에서 신선놀이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 공부깨나 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교적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이들이 바로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의 아이콘입니다. 대승의 길은 아라한의 깊은 산골에서 나와 사람의 마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회향입니다. 모름지기 철학자라면 아라한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회향하는 보살, 참 붓다의 숙명을 기꺼이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철학을 공부함에서 마치려면 깊이에 빠져도 되지만, 철학함doing philosophy으로 나아가려면 ‘깊은 수준’의 ‘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휴먼스케일 안에서 휴먼스킬이 되어야 합니다. 세월호사건을 겪은 대한민국에서 철학함이란, 휴먼스킬 됨이란 막춤꾼 되기입니다. 아니 모자랍니다. 막싸움꾼 되기입니다. 저는 아픔과 죽음이 전방위로 들이닥치는 현장을 지키는 임상의입니다. 변방 한의사입니다. 온 영혼에 그득 담은 이 땅의 눈물을 빌어 간절히 기원합니다. 전대호가 부디 옹골찬 막싸움꾼 되기를!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