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0장 다섯 번째 본문입니다. 


凡事豫則立 不豫則廢. 言前定則不跲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道前定則不窮.

범사예즉립 불예즉폐. 언전정즉불급 사전정즉불곤 행전정즉불구 도전정즉불궁.


무릇 모든 일은 미리 준비되면 이루어지고 미리 준비되지 않으면 어그러진다. 말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착오가 생기지 않고 일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곤란하지 않게 되며 행동하는 것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탈이 없게 되고 방법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궁하지 않게 된다.  

 

2. 이 문단 또한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앞에서 아홉 가지 다스림의 원칙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다가 느닷없이 예豫와 전정前定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편집자가 흩어져 있는 문서 조각fragment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이 아닐까 합니다. 칼 같은 문헌비평에 의거 빼버려도 무방하겠지만, 이 경우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자연스러움을 보완해주는 방향으로 해석하면 크게 무리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수신修身문제를 계속해서 말하였고, 이 문단 바로 뒤에서는 성誠 문제를 언급합니다. 대략 이런 연결의 지도리로 예와 전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사회적 실천의 핵심으로 사적 실천을 놓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인 앞섬, 예비적 단계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개인 개인의 내면적 성찰과 꼿꼿한 발걸음 없이 사회적 외양만을 갖추고서는 참된 중용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의미 내함은 수신과 한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다음 문단의 성과 잡는 것이지요. 

 

예전정豫前定은 끊임없는 실천의 닦음, 즉 수신의 자세를 다른 방향에서 본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매 순간 알아차리고 챙겨야 적확한, 곧 성誠인 사회적 실천, 즉 중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의미 덩이들을 이런저런 측면에서 살핀 것이 수신, 예전정, 성으로 표현되었다고 이해하면 간편합니다. 물론 성은 그 자체로 중 또는 중용의 ‘본토’에 깊이 발 들여 놓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연속성을 구태여 예리하게 구분할 실익은 관념 영역에서나 찾을 일입니다. 궁극적 실천영역에서는 상호 연속성이 그대로 힘이 됩니다.   

 

3. 예전정은 사회의 동향, 역사의 흐름을 읽고 참여하는 삶에서 일어나는 통찰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올바른 결과를 내기 위한 기계적 인과간계의 전제 조건으로 예전정을 거론하는 게 아닙니다. 예전정은 선택이며 결단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투명한 정신, 옹골찬 기상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야합과 흥정이 설 땅이 없습니다.

 

국가의 현안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지배층의 야합과 흥정을 백성은 아프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장관도 언론도 재벌도 전혀 예전정이 안 된 상태에서 준동하고 있습니다. 하기는 오로지 모든 것을 사익추구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자들에게 무슨 자기성찰과 현실인식이 있겠습니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제 곳간을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에게 예전정은 어수룩한 처세일 따름입니다.


참으로 예전정하려면 저 “높으신 분”들은 저자 거리로 나와야 합니다. ‘특별함’의 기득권과 편견을 타고 앉은 채 구름 위에서 이루어지는 인仁은 없습니다, 중용은 없습니다. 지도층입네 하며 자기기만 하는 자리에서 냉큼 내려와 필부필부의 현실과 호흡해야 합니다. 그들의 구체적인 소리를 경청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순舜임금의 실천인데 누가 감히 여기에 토를 달 것입니까.


4. 팽목항에도 안산 분향소에도 “높으신 분”께서 친히 다녀가셨습니다. 유족의 말도 들으셨고 정중히 조문도 하셨습니다. 물론 이 모두 설정이었습니다. 현장을 파악하고 민심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미지 조작일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부풀려 전시하였습니다. 전시된 체험은 삶의 일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삶의 바깥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 “높으신 분”의 약속은 휴지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인문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체험Erlebnis과 경험Erfahrung을 구별했습니다. 체험은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경험은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야말로 현실에 몸 담그는 것입니다. 현실에 몸 담그는 것은 전시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조선의 왕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왕의 미복잠행은 적어도 전시 효과를 노리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체험 관광을 계속하고 있는 국가수장에게 국민은 언제까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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