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울증을 전 지구적 문제라고 전제할 경우 이는 비단 인간 생명의 차원에만 국한할 수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의 지나친 진화와 번성이 몰고 온 지구 생태계 전반의 위기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킬리만자로의 눈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과 인간의 우울증 사이엔 분명한 함수관계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거침없는 진화를 통해 자연을 대상화, 타자화한 결과가 이제 부메랑이 되어 인간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이 잔혹한 문명의 혜택을 독점, 향유하는 헤게모니 블록은 자기 단일성의 미망에 빠진 분열증 집단입니다. 그들은 나머지 인간 그리고 자연과 소통하기를 거절합니다.
이 광포한 분열증에 대한 경고가 바로 우울증입니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반성 불능의 자기단일성에 집착하는 분열증 집단의 먹잇감에게 씌워진 굴레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은 이 먹잇감이 다른 존재, 즉 자기 포식자에 대한 공감, 배려, 보살핌으로 자신의 생명을 잠식해 들어가는 병입니다. 우울증 환자의 영혼은 고요히 흐르는 깊은 강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투명한 통찰력을 지녔으나 따스합니다. 그들의 감각은 눈부시나 각질이 말랑말랑합니다. 하여 이 잔인한 문명 안에서의 삶은 백전백패입니다. 이 슬프고도 장엄한 패배를 온 영혼에 지닌 존재들이 저 승리자들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저들이 죽어가면서 자연을 향한 분열증 집단의 돌진을 막습니다. 그들은 우울증이라는 천형을 덮어쓰고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절규하고 있습니다. 분열증적 자기단일성으로 승리한 문명의 적자, 저 비정한 ‘1%’가 끝내 이 선한 영혼, ‘등경(등잔걸이)을 말 아래 두는’ 생명들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멸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울증은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해 분열증 문명과 자연의 경계에 핀 슬프고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인류가 이 사실에 귀를 기울이고 총력을 기울여 생명의 연속성, 연대성을 복원한다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오래토록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이 웅숭깊은 문명비판이 구원의 무지개로 뜨기를.(305-306쪽)
상담을 하다 보면 이른바 보호자, 특히 어머니가 치료를 가로막거나 망쳐놓는 일이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상담하는 의사를 뒤에서 조종하려 듭니다. 자신이 아이를 병들게 했다는 각성은 없습니다. 도리어 의사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함으로써 아이를 더 말 잘 듣는 기계로 만들겠다는 전략만 있을 뿐입니다.
어제도 한 어머니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딸의 상태가 어떠냐고 건성으로 물은 뒤, 딸이 더욱 악화된 것 같다고 대뜸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전혀 말이 안 되는 엉터리 소리를 해대며 덤빈다고 근거를 댔습니다. 딸이 하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재차 못을 박았습니다. 필경 그 딸을 이런 방식으로 키웠을 것입니다.
저는 그 어머니에게 또박또박 냉정하게 말해주었습니다. 따님은 분명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결코 악화된 것이 아닙니다. 따님의 말은 엉터리가 아닙니다. 설혹 엉터리라 해도 그 말을 할 수 있게 놓아두셔야만 합니다. 어머니께서 차후 해주실 일은 그 어떤 평가도 간섭도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시는 것 하나뿐입니다.
그 어머니는 단절적으로 성공하려고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온 전형입니다. 현재 그가 누리는 부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 과정에는 반드시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마침 여리고 감수성 풍부한 딸이 있었습니다. 손쉽게 그 딸은 연속성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 딸은 자기 자신을 퍼내 남에게 주며 거듭거듭 비어갔습니다.
비고 또 비어 마침내 텅 빈 순간 아프디아픈 깨달음이 들이닥쳤습니다. 우울증입니다. 자신의 우울증을 알아차리고 치료를 시작하면서 그 딸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도 병들어 있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딸은 아픈 마음을 이끌고 병의 물길을 막아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도 아이도 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