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3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자왈 두불원인 인지위도이원인 불가이위도.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시운 벌가벌가 기즉불원 집가이벌가 예이시지 유이위원 고군자이인치인 개이지.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충서위도불원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 군자지도사 구미능일언.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 朋友 先施之 未能也.

소구호자 이사부 미능야 소구호신 이사군 미능야 소구호제 이사형 미능야 소구미호 붕우 선시지 미능야.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용덕지행 용언지근 유소부족 불감불면 유여불감진.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언고행 행고언 군자호부조조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를 한다고 할 수 없다. 『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법이 멀지 않네.'라 하니 도끼자루를 가지고 도끼자루를 베면서 곁눈질해 보며 오히려 그것을 멀게 여기나니, 그러므로 군자는 남의 처지에서 남을 다스리다가 고치면 그친다. 忠과 恕는 도에서 벗어남이 멀지 아니하니 자기에게 베풀어서 원하지 아니하는 것이면 또한 남에게 베풀지 아니한다. 군자의 도는 네 가지이니 나는 한 가지도 할 수 없다. 아들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신하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임금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동생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형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벗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먼저 벗에게 베푸는 것을 할 수 없다. 평범한 덕을 행하는 것과 평범한 말을 삼가는 데에 모자람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고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아니한다. 말은 행함을 돌아보고 행함은 말을 돌아보아서 서로 일치하도록 해야 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아니하겠는가.”


2. 군자 위도爲道의 참 도량道場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사람도 그냥 ‘평범한[용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사람입니다. 앞 장에서 말한 필부필부匹夫匹婦평범한 사람들의 성性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 찬찬히 사람과 사람 관계를 살펴 나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가 익히 경험한 바, 이른바 대가들이 풀어놓은 중용은 지나치게 고답적이고 관념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중용을 격리시키려는 저의를 가진 것처럼 온갖 현학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허나 중용은 필부필부의 성이 발원지이고 거기서 부자, 군신, 형제, 친구 등과 같은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자연스레 흘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용이 어려운 것은 신비한 경지를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나를 앞세우는 탐욕으로 가로막히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소통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남을 ‘관통’하려고만 하지 남을 ‘흡수’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용은 남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남의 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할 바를 먼저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내 마음, 그러니까 충忠이 그대로 먼저 헤아린 남의 마음, 그러니까 서恕여야 중용입니다. 나와 남 사이에 그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야 중용입니다. 내게 필요한 꼭 그것만큼 남에게 필요한 꼭 그것이 서로 유쾌하게 오가야, 그러니까 거래去來해야 중용입니다.


부부가 성을 나눌 때 일어나는 관통과 흡수는 동일한 원리로 부자, 형제, 친구, 군신 관계에 적용됩니다. 임금의 정치 행위가 부부의 성 행위보다 고급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잘한 일상사에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소통이 그대로 중용입니다. 사실은 그 사소함에 마음을 온통 담는 게 어려워 공자는 여기서도 “못하겠다.”고 사양합니다.


3. 자연스럽게, 그러므로 공자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흐릅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을 소통의 ‘서로 주체’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마주섬으로써 자신의 그릇을 넓힌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관통과 흡수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모순을 통합하는 역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대동大同을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언제라도 자신의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웅얼거림에 귀 기울입니다. 군자는 천하를 위해 찰나마다 자신의 내면을 흔듭니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흔들림으로써 깨어 있는 군자의 영혼은 정확하게 중용의 축을 가리킵니다.


이런 성찰은 남과의 소통에서 온 깨달음입니다. 거꾸로 남과의 소통은 이런 성찰을 통해 더 깊고 넓어집니다. 궁극은 천하무인天下無人세상에 남이란 없다, 그러니까 사물화 되는 존재가 없는 생명연대입니다. 그런 세상이 올 때까지 군자는 독실함을 생활 기조로 삼아 벗어나지 않습니다. 중용은 결코 자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어떤 독실한 불교 신자가 큰스님께 말했습니다. “한 젊은 도반이 불심이 돈독함에도 교회 다니는 신혼의 아내 때문에 교회 나간다고 합니다.” 큰스님이 말했습니다. “아직 불교에 대한 확철대오廓徹大悟크고 철저하게 깨달음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가소로운 대화입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큰스님이라면 “아마 불교에 대한 확철대오가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라고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정체성은 너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찌 대하는가, 가 곧 나입니다. 내가 대하는 네가 누구인가, 가 곧 나입니다.



이백오십이나 되는 생떼 같은 자식 잃은 부모더러 ‘세금도둑’이라 하는 자야말로 세금도둑입니다.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시민을 ‘종북’이라 하는 자야말로 종북입니다. 다 죽여 놓고, 진실을 은폐한 채, 부모더러 ‘본디 자리로 돌아가라.’ 하는 자야말로 본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만 보고 남을 규정하고, 나만 보고 나를 규정하는 저 ‘특별한’ 사이비 군자들이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진실을 아는 평범한 필부필부들이여, 부디 가만히 있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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