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영어는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 언어입니다. man이 남성이자 인간임에 반해 wo-man은 여성이자 제한적 수식어가 달린 부차적 인간쯤으로 상정된 것입니다. 중국인의 생각이 담긴 한자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혼인한 두 사람 사이를 부부夫婦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두 사람 사이를 남녀男女라고 합니다. 우리는 전자를 ‘가시(지어미)버시(지아비)’라고 합니다. 후자를 ‘연놈’이라고 합니다.

  이런 특징에서 우리의 세계관이 상대적으로 여성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17세기 후반 이후 성리학의 완고한 가부장주의가 우리 사회를 제압하기 이전에 여성의 지위는 다른 문명국가 그 어디와 비교해도 높았습니다. 비단 사회적 지위 문제에 국한시킬 일이 아닙니다. 우리 문화 전반에 깃든 여성성은 우리의 전통적 사고구조와 삶의 양식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비록 현재의 사회정치적 제도와 분위기가 여성성을 억압하고 있지만 장차 여성성은 우리 사회의 관건적 화두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때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공동체적 여성성은 놀라운 역동성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성성 문제는 여태까지 다루었던 우리말의 생태학 전반이 흘러드는 바다 같은 위상을 가집니다.

  상담이나 심리치료 문제에서도 서구의 주류적 방식은 근본적으로 남성적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모든 내용에서 이런 면모가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태에 맞는 상담이나 심리치료 이론을 정립하고 임상적 실천을 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내면 깊숙이 지닌 여성성을 확인하고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199-200쪽)


이 서재에서 두 번 박길주 선생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리뷰 『투명사회』(30)-<아름다움, 그 시간의 향기>(2015.6.5)에서 한 번, 페이퍼 <잔 두 개>(2016.3.30)에서 한 번. 45년의 격조를 건너 마침내 오늘(2016.4.29) 아침,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45년 전 그 기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날 이미지와 다소 어긋나 보이는 노년어법이 무르녹아 있긴 했지만 이내 친근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를테면 학생을 가르치던 카랑카랑한 선생님의 목소리에서 자녀를 키워낸 말랑말랑한 어머니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던 셈입니다.


사실 제가 선생님을 이렇게 다시 만나 뵐 수 있었던 데는 두 여성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우선은 선생님의 딸입니다. 그가 어머니 페북에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밝혀놓지 않았다면 제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어머니 페북에 어머니 사진을 올려놓지 않았다면 제가 확신 없이 포기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거의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페북 활동을 몇 달 동안 중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페친의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러니까 친인척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을 발견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가 연락처를 알아내기에 유리한 공적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선생님께 여쭌 다음 마침내 전화번호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선생님의 며느리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셨다면 이 만남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결국 제게 선생님이심은 누군가에게 어니이심의 손에 이끌려 더 큰 인연으로 자라갈 수 있게 된 셈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제 인생에서 결정적인 문 하나를 닫으신 분입니다. 닫음은 닫음대로 아픔의 길을 따라 깨달음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박길주 선생님은 제 인생에서 결정적인 문 하나를 열어주신 분입니다. 엶은 엶대로 통찰의 길을 따라 깨달음의 땅으로 들어갑니다. 아픔도 한 인연이며 통찰도 한 인연입니다. 어둠도 한 생명이며 빛도 한 생명입니다. 오늘 박길주 선생님의 목소리에 실려 삶의 깊은 결 하나를 다시 보듬습니다. 선생님에게서 어머니를 읽듯, 어머니에게서 선생님을 읽으니 실로 일심-화쟁-무애가 몸 느낌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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