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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속내를 감추는 어법이라면 가히 보편적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이 언어적 표현의 극대화를 통해 이런 목표를 달성한다면 우리는 표현을 극소화하고 함축성을 극대화 하거나 중의重義적으로 함으로써 이런 목표를 달성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괜찮다’, ‘됐다’입니다. 액면 그대로의 의미와는 달리 문맥에 따라 이 말들은 매우 미묘한 속내를 표현하는 데 두루 쓰입니다. ‘괜찮다’며 용인하지만 묵직한 불만이 깔리는가 하면 ‘됐다’고 사양하지만 강한 소망이 깃들어 있기도 합니다. 행간이나 여백을 순식간에 읽지 못하면 정반대 반응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의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그 의미만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명쾌하고 단도직입적인 거래보다는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본의를 곡진하게 드러내는 은근한 흥정에 익숙한 삶이 반영된 것입니다. 달 그림을 그릴 때 주위에 구름을 그림으로써 간접적으로 달이 드러나게 하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의 기법과 같은 것이지요.
이런 소통 방식은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유연한 완충제 구실을 해줍니다. 단절성과 연속성의 절묘한 갈림길에서 순간이나마 ‘발효’의 시공간을 둠으로써 서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직접 상대방의 마음에 입을 대지 않고 자신의 마음부터 입을 대 단절 가운데서 연속을 찾는 은유의 치료가 일어나게 합니다.(197-198쪽)
입계의완入界宜緩. 남의 경계로 들어갈 때는 부드럽게 천천히 하라는 바둑 격언입니다. 바둑은 놀이의 성격을 지니지만 분명히 승패가 갈리는 싸움입니다. 싸움에서조차 부드럽게 천천히 하라고 충고하는데 하물며 마음치료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마음에 병이 들어 치료 받으러 온 사람은 도나 지식을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치료자의 위치에 서는 사람은 그러므로 지도자나 스승이 아닙니다. 치료에 진리나 진실의 자리가 있어 도나 지식이 전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치료는 깨우침이나 가르침과 다릅니다. 병에서 오는 아픔은 진리를 추구하거나 진실을 규명하려는 고뇌와 다릅니다. 포개지는 영역을 딛고 거칠게 신속히 쪼개지는 영역으로 발 들여놓는 종교 장사꾼과 인문 장사꾼의 대박 때문에 우리사회의 마음병 치료는 일대 혼선을 빚고 있습니다. 저들은 의학적 진단과 그에 따른 치료에 무지한 채, 그것을 무시하고 이를테면 아마추어적 종교‘치료’, 인문‘치료’를 자행합니다. 의학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의학의 경계로 함부로 넘어오지 말든지, 적어도 넘어오려면 부드럽게 천천히 하든지 하는 예의만이라도 갖추어야 합니다.
마음 아픈 사람의 험한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제가 단도직입이나 돈교頓敎의 어법을 쓰는 경우는 딱 두 상황뿐입니다. 이성에 기댄 그 어떤 설명으로도 아픈 사람의 굳은 관성이 깨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될 때가 그 하나입니다. 아픈 사람이 공격적 자세를 풀지 않고 끊임없이 덤벼서 임계점을 넘어설 때가 다른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가급적 모욕감을 느끼지 않고 단박에 한 생각 돌이키게 할 수 있는 통찰을 벼렸다가 '쓰윽' 하고 씁니다. 정색하고 언성을 높여 야단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뭅니다.
성동격서 도남의재북聲東擊西 圖南意在北. 동에서 소리를 내고 공격은 서에서 한다, 남을 도모하면서 뜻은 북에 둔다는 바둑 격언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의 굳은 땅으로 들어갈 때 제가 잘 쓰는 방법은 은유가 가능한 예화를 드는 것입니다. 예화의 많은 부분은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서구정신의학의 걱정과 달리 의자가 스스로 경계를 허물면 아픈 사람의 경계는 말랑해집니다. 1인칭 어법은 아픈 사람의 마음 문제에 직접 입대지 않고 그 빗장을 푸는 수승한 방편입니다. 단순한 전략이 아닙니다. 연대의 진정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