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0장 본문입니다.

 

子路問强. 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君子居之.

자로문강. 자왈 남방지강여 북방지강여 억이강여. 관유이교 불보무도 남방지강야 군자거지.

衽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 故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임금혁 사이불염 북방지강야 이강자거지. 고군자 화이불류 강재교. 중립이불의 강재교. 

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유도 불변색언 강재교. 국무도 지사불변 강재교.


자로가 강한 것에 대해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답하셨다. “남방의 강함인가? 북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으로써 가르치고 무도한 자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는 이를 택한다. 창검과 갑옷을 깔고 누워 죽어도 싫어하지 아니함은 북방의 강함이니 너의 강함은 이를 택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되지만 흐르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가운데에 서서 기대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2. 남방과 북방을 대비한 본문은 아무래도 후대 냄새가 납니다. 물론 고증과 무관한 감각입니다. 남북에서 남은 중원 또는 남송을 가리키는 한족漢族, 곧 화하華夏족의 가치와 연결되고 북은 이른바 오랑캐의 가치와 연결되는 암시가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우리는 본문을 꿰뚫고 내용을 간취하면 됩니다. 요컨대 군자는 유연하고 관대한 내면의 덕으로 강함을 삼지 힘으로 밀어 붙이는 외적인 제압으로 강함을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맥락이 서로 닿아서 문득 생각난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선친께서 들려주셨던 김굉필 부자의 일화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널 속이려 한다. 어떻게 그것을 막겠느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첫째, 감히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이지요. 둘째, 능히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식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셋째, 차마 속이지 못 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힘으로든 지식으로든 다 가능하지만 인격적 승복 때문에 속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최후의 것이 으뜸입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로가 추구하는 강함은 춘추전국의 제후적인 강함이었습니다. 공자는 그것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눈에는 과연 누가 자로일까요? 약탈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정체성으로 가진 지배집단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너그러움도 부드러움도 없습니다. 무도한 자가 아니어도 자신과 다르기만 하면 보복을 감행하면서 개혁이라 우깁니다.  

 

하필 왜 강함의 화두가 여기서 나온 것일까요? 우리 관점에서 보면 지당한 흐름입니다. 중용은 강자, 승자의 덕목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강자, 승자의 경직성에서는 결코 소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소통 없이 ‘평범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두 평범함에 깃들 때 평등의 원리, 즉 대동大同이 실현됩니다.

 

필요악(!)으로서 사회계층구조가 인격의 계층구조가 아님을 깨닫는 통치 세력이 아닌 한, 그들은 죄다 자로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로의 무리들이 제아무리 누구를 종북이다, 좌경이다, 급진이다 몰아쳐도 자신들이 턱없이 중용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3. 이제 본격적인 중용의 도가 나옵니다. “어울리되 휩쓸리지 않는다.”, 또는 “어울리되 새나가지 않는다.”로 읽을 수 있는 화이불류和而不流는 아마도 화이부동和而不同과 근본적으로 같은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 느낌으로는 화이불류가 훨씬 역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제후적인 가치, 그러니까 약탈자본주의의와 신자유주의의 시대정신과 함께 뒤섞여 흘러가지 않는다는 함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불의不倚] (우뚝) 서서 벗어나지 않는[중립中立] 꼿꼿함[교矯]이야말로 군자의 강함이라고 『중용』은 갈파합니다. 제 생각으로, 중립은 가운데 선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기대지 않고 (우뚝) 선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중中에 대한 명사적 독법에 반대한다는 우리의 뜻과 상응한 해석입니다.

 

4.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궁색함[색塞]을 얼마든지 벗어나도 될 테지만 찰나마다 중용의 실천에 깨어 있으려고 늘[불변不變]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간직하는 것이 군자의 기품입니다. 이 불변은 자기의무로서 결단입니다. 반대로 나라가 어지러울 경우 제후적인 가치가 군자를 유혹, 나아가 핍박할 것입니다. 이 때는 결연히[지사至死] 맞서서 본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이 불변은 공적 의무로서 저항입니다. 꼿꼿함도 이처럼 시중時中하는 것입니다. 『역경』의 저 유명한 말 군자표변君子豹變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매우 빠르고 뚜렷함이 떠오르는데, 궁극적으로 같은 맥락으로 여깁니다.


5. 요컨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 어울리되 함께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 사유와 실천을 지켜내는 꿋꿋함을 시대 상황에 맞게 발휘한다면 진정 강한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는至死不變 강한 꿋꿋함을 지닌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에는 도가 없기國無道 때문입니다.


헌법이 있어도 가장 중요한 조문을 사문死文으로 만드니 도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선거법이 있어도 국정원과 군대가 개입하여 부정선거를 자행하니 도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국가원수가 있어도 어린 국민 250명이 침몰하는 배에서 죽어 가는 그 7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도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 무도한 나라에서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는 강한 꿋꿋함을 체현하는 군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물론 이른바 사회지도층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물대포와 캡사이신 맞으며 진실을 세우려는 평범한 이름 없는 시민 가운데 이런 군자가 있을 테지요. 죽임당한 아이들의 부모가 바로 이런 군자일 테지요.


참으로 무도한 국가에서 참으로 수치스러운 국민 노릇밖에 못하며 사는 저와 같은 소시민은 차마 눈길 둘 데가 없습니다. 먹고살아야 하고, 처자식 안위 돌봐야 한다는 맹렬한 불안을 끝내 떨쳐낼 수 없습니다. 하찮은 삶이 토해내는 우울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과 우울을 증폭시키는 무도한 지배집단에 끌려 다니면서 느끼는 이 치 떨리는 모멸감! 참으로 비루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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