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말은 서양 언어에 비해 시제어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과거, 과거완료, 대과거, 미래, 미래완료 등의 정교한 시간적 분절과 특성들을 우리말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다분히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시간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을 정교하게 나누는 것은 사물이나 사태를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하여 정량적定量的으로 사유하는 서구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시간의 각 단위들에 객관적 경계를 설정하여 서로 넘나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지요. 마치 코스요리와 같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정성적定性的 감수성으로 지각합니다. 시간의 주관성에 주의합니다. 마치 한상차림 요리와 같습니다. 시간은 서로 다른 색채의 것들이 함께 어울려 흐르기도 하고, 가역적일 수도 있고, 격절이 생기기도 하고, 질적 특이성으로 고밀도가 되기도 하고, 텅 비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파동을 구획 안에 따로 가두는 것은 우리와 아주 낯선 방식입니다. 정성적 시간 감각은 장場적 감각입니다. 장적 감각은 전체성 안에서 한꺼번에 사태를 파악하는 관통 능력을 키워줍니다. 이런 감각과 능력은 구획, 격자에 길들여진 체계로는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차별성의 지점에서 우리는 ‘통짜상담’으로 열리는 ‘단박치료’의 길을 보는 것입니다.(196-197쪽)


아침나절 한의원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던 울음소리가 여적 남아 있다 배어나오는 듯합니다. 40대 초반 여성이 봉인되었던 시생대 기억을 더듬으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성적인 학대를 핵심으로 하여 존재의 경계선을 지워나간 학대의 삽화들이 끝도 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몸 외적인 형체는 40대 초반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밀한 몸, 그 감각은 성 학대를 당한 그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그의 마음 외적인 형체는 40대 초반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밀한 마음, 그 감각은 성 학대를 당한 그 시점에서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하여 그의 생명 시간은 기억의 연어가 되어 역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구획대로 흐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마음, 다시 무엇보다 상처 입은 마음 생명 시간은 웅크리고, 곤두박질하고, 주름지고, 튕겨나가고, 무찔러갑니다. 또박또박 흘러가면서 상처를 지워내는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잊자 한다고 잊히는 과거 따위는 없습니다. 즐기면 마냥 행복한 현재 따위는 없습니다. 간절히 소망하면 오는 장밋빛 미래 따위는 없습니다. 포개지고 쪼개지며 부서지고 들러붙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뒤엉켜 흘러가는 것이 삶의 시간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바로 이런 장場, 그것도 난장을 경험하는 순간들로 범벅이 됩니다. 40년 전이 오늘 아침으로 솟아오르고 오늘 아침이 40년 전으로 꺼져버립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마음 치유란 이런 혼돈 속에 함께 앉아 있는 일입니다. 마음 치유란 이런 무질서 속에서 손잡는 일입니다. 함께 앉아 손잡는 일은 아픔의 시간을 구획 지어 양적 질서를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앉아 손잡는 일은 아픔의 시간마다 다른 색조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질적 결을 벼리는 일입니다.


치유의 시간은 아무리 잘라내도 통짜입니다. 치유의 시간은 아무리 늘여도 단박입니다. 이런 시간 감수성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를 낯설게 여기신다면 그대는 너무 많이 타인입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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