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9장 본문입니다.
子曰 天下國家 可均也 爵祿 可辭也 白刃 可蹈也 中庸 不可能也.
자왈 천하국가 가균야 작록 가사야 백인 가도야 중용 불가능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하나 국가도 고르게 할 수 있으며, 벼슬이나 녹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도 디딜 수 있으나 중용은 할 수가 없다.”
2. 중용은 과연 최고의 덕입니다. 천하나 국가를 고르게 하는 위대한 정치력의 ‘특별함’으로도, 큰 벼슬이나 녹을 받을 만한 재목의 ‘특별함’으로도, 시퍼런 칼날을 디딜 수 있는 재능의 ‘특별함’으로도 접근이 불가능한 가치입니다.
중용의 이 도저한 ‘평범함’은 인간 생명의 전 면모를 통해 드러나는 통합가치입니다. 참된 소통의 흐름에 자신을 싣는 유연한 느낌, 소통을 꿰뚫어 보는 슬기, 꿋꿋이 소통을 실천하는 옹골참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오히려 ‘특별함’이 더 쉽습니다. 애써 통합할 것 없이 갈라놓으면 그뿐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중용실천의 전제 조건을 살펴보면 “이걸 어찌 평범하다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도리어 관념적이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허나 핵심은 무엇이 평범한가 하는 추상적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누리기를 바라는 권력, 돈, 종교가 특별한 가치로 이미 자리매김 되어 있는 현실 세상이 대동大同을 거절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결국 평범하지 않은 것을 평범하다 하는 요청적인 어려움은 바로 그 사이비 ‘특별함’ 때문에 생긴 난제인 셈이지요. 세상이 꼬인 것입니다. 가치가 뒤바뀐 것입니다. 이래서 중용은 혁파입니다. 혁파이기 때문에 공자의 입에서 “할 수가 없다[불가능야不可能也]”라는 탄식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3. 요즘 우리사회 돌아가는 모양이 꼭 그와 같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은 입만 열면 원칙, 정의, 개혁을 말합니다. 원칙을 어기고, 정의를 무너뜨리며, 수구로 일관하는 사람일수록 엄숙하거나 환히 웃는 표정을 지으며 천연덕스럽게 그런 거짓말을 합니다. 매우 쉽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그렇게 부정선거 해서 헌법기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다에 빠뜨려 아이들 죽여 놓고 눈물 따로 웃음 따로 팔아서 정국 수습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업인들한테 검은 돈 받아서 곳간도 불렸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자신감에 차서 내키는 대로 말하고 닥치는 대로 행동해도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이제 누가 꾀한다 해도 혁파로서 중용은 아득한 것이 되었습니다. 평범함의 통합가치를 구현해낼 수 있는 희망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평범함의 통합성은 못난 사람의 오지랖으로, 특별함의 분열성은 잘난 사람의 덕목으로 고착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고위 공직자가 되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범죄행위가 무용담이 되는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삶은 무능의 표지일 따름입니다. 웬만해서는 이 모멸을 견뎌내기 쉽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쓰든 무능의 굴레를 벗어나야 하기에 튀는 길을 찾습니다. 튀는 방법 중에 범죄가 포함될 뿐입니다. 튀면 뜹니다. 뜨면 모든 것이 ‘용서’됩니다. ‘용서’의 타락으로 대한민국은 범죄자지도체제를 확립합니다.
범죄보다 더 ‘파렴치하고 무서운’ 무능의 큰칼을 쓴 평범한 사람들, 그러면 어찌 살아야 할까요? 튀려는 유혹을 떨쳐내고 정상적인,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무슨 기적이나 비법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삶의 이치를 헤아리면 고요 속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악한 정치가 죄를 지은 대로 가게 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덕을 쌓은 대로 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덕은 무엇일까요, 이 대한민국에서? 수탈당하여 바닥을 보고야 만 약자의 인식론적이고 실천적인 특권, 그러니까 낮디낮은 생명연대가 바로 덕입니다. 약자는 누운 자리에서 서로의 눈을 맞춥니다. 약자는 누운 자리에서 서로의 손을 잡습니다. 그 마음으로, 그 몸으로 서로를 일으켜갑니다. 그 일으킴으로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안산에, 팽목에, 광화문에, 그리고 또 강정에, 밀양에, 소녀상 옆에 그들이 누워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