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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서구의 말은 나와 상대방 사이에 나의 행위를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성과 상대방의 객체성을 명확히 합니다. 이런 거리두기를 통해 객체는 사물화 됩니다. 그러나 우리말은 나의 행위에 앞서 상대방을 세움으로써 상대방을 마주선 주체로 대접합니다. 이른바 서로주체성이지요.
우리말이 상대방을 귀중하게 대접하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부정의문에 대한 답변 방식이 영어와는 정 반대인 것을 아시지요? 영어는 질문자와 상관없이 자기 의사만 밝히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말은 질문자의 의중에 맞추어 대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에만 있는 압존법(문장의 주체가 화자보다는 높지만 청자보다는 낮아 그 주체를 높이지 못하는 어법)도 그런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윗사람이라 하더라도 직접 말을 주고받는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어 존칭어를 쓰지 않는 것이니 말입니다.
마주선 상대방에게 주의하고 그의 처지에 따라 말을 주고받는 이런 특징이야말로 우리말이 ‘하는’ 말보다는 ‘듣는’ 말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소통을 위한 대화는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귀를 기울이는 자세는 상대방을 대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표지입니다. 진정한 대화와 소통은 평등한 서로주체의 상호작용입니다. 마음의 아픔으로 고통 받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열등한 대상으로 취급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내담자의 존재 자체가 병든 것도 아니므로 더욱 그러합니다. 상담자 또한 어딘가 결핍이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치료는 그 어떤 치료 행위보다 상호적이어야 합니다. 평등한 소통이어야 합니다.(192-193쪽)
내면에는 청소년이 다글다글한 20대 중반 청년과 띄엄띄엄 여러 해째 상담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언제나 끝까지 믿을만한 (이를테면 신앙의 대상 쯤 되는)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믿을만한 사람을 찾아 헤맸습니다. 찾았다 싶으면 그들을 좇아갔습니다. 뜨르르한 승려가 그 대표적인 추종 대상이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나를 믿지 마라. 그때그때 너와 제대로 소통이 되는지 확인해라. 그뿐이다.”
즉문즉설이라는 ‘사이다’ 이벤트로 마음 아픈 사람들을 홀리는 승려와 그것을 흉내 내는 인문학 장수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얼마나 깨달아 무엇을 얼마나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지 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저들이 늘 아픈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가르치거나 야단치는 행태 자체입니다. 물론 치유도 넓게 보면 가르침입니다. 물론 아픈 사람도 잘못을 범할 수 있으므로 야단치는 일, 가능합니다. 하지만 가르치고 야단치는 자격과 권위를 대체 누가 부여한 것일까요? 장삼가사 걸친 승려면, 저서가 수두룩한 철학자면 객관적으로 자격과 권위가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 또한 그렇다 칩시다. 그 가르침으로, 그 야단침으로 아픈 사람은 과연 어찌 될까요?
저들 승려와 인문학 장수들을 거쳐 사람들이 제게 옵니다. 반대로 제가 모자라서 저를 떠나는 경우라도 결코 저들에게로 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를 거쳐 간 사람은 적어도 승려와 인문학 장수들한테 배우고 야단맞아 자신의 아픔이 치유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떠나기 때문입니다. 저들과 저의 차이는 단 하나, 아픔의 실재에 대한 인식입니다. 저들은 마음 아픔을 마음 아픈 사람의 잘못으로 새깁니다. 저는 마음 아픔을 마음 아픈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의 어긋남으로 새깁니다. 저들은 그러므로 잘못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야단칩니다. 저는 그러므로 사람 사이 어긋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쌍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저들은 아픈 사람을 따돌린 채 저들 자신의 내러티브를 구성합니다. 저는 아픈 사람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도록 돕습니다.
마치 제 자랑처럼 들리는 말들입니다. 자랑이 아닙니다. 자학의 험한 강을 건너 도달한 자성입니다. 의자醫者 이전에 저 또한 도상의 존재입니다. 아직도 많이 아픕니다. 아픈 채, 아픔의 시간을 아픈 사람과 함께 흐르며 지나가는 길동무일 뿐입니다. 저의 의학과 인문학에는 바로 이 시간성이 존재합니다. 시간성 속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 속에 기다림이 있습니다. 기다림 속에 너와 나의 평등한 만남이 있습니다. 평등한 만남 속에 진정한 치유 공동체가 있습니다. 진정한 치유공동체 속에서 시간성을 누락시킨 종교적 교설과 철학적 강론의 독버섯은 결코 자라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들 승려와 인문학 장수들이 훤화하며 대박을 내고 있는 동안 이 땅의 아픔, 그 심장에 놓인 세월호 가족들은 어떻게 더 잔혹하게 슬픔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