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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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안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있습니다. 앞의 말, 즉 실사實辭가 아무리 중요해도 맨 나중에 배치되는 ‘이다’, ‘아니다’라는 허사 한 마디로 의미가 뒤바뀌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변적, 비본질적인 것이 중심적, 본질적인 것을 좌우하는 셈입니다. 대륙에서도 주변이고, 해양에서도 주변인 우리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연결하면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 우리가 경험한 주변부적 삶에서 이 어법의 기원을 찾는 일이 마냥 허황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두 중심 세계가 마주선 가장자리에서 거머쥔 ‘캐스팅 보트’의 역동적 감성이 지니는 절묘함을 안다면 우리말의 이런 특성을 문제 해결의 열쇠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나-중심을 끊임없이 버리면서 남-경계, 주변, 가장자리로 나아갈 때 진정한 경청,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중심인 내가 아니라 주변인 남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 남의 처지에서 보면 내가 주변이므로 이런 상호 관계가 소통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바탕이 됩니다. 실사를 움직이는 힘이 허사에 있다는 말은 이렇게 유력하고, 구성적이고, 가시적이고, 비범하고, 중요한 것들 중심으로 사고하는 패권주의를 거부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무력하고, 무위無爲적이고, 비가시적이고,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시각을 담고 있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것은 수천 년 맞-가장자리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하늘이 내린 인식론적 축복입니다.(191-192쪽)


“악마는 프랑스에서 탄생했다는 말이 있다. 악마를 부르는 the other나 l'autre가 영국에서 나폴레옹을 부르는 말이기도 해서 그런 말이 나왔겠지만, 이 이전에 프랑스의 어떤 근성,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를 파려는 그 투지에 원인이 있다.”


얼마 전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올린 글입니다. ‘명석하지 않으면 프랑스어가 아니다.’라는 말도 있거니와 사유란 언어를 통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치고 보면 프랑스적 사유의 ‘근성,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를 파려는 그 투지’는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릅니다. 전공자가 아닌 제 일천한 독서 경험만으로 보더라도 프랑스적 사유는 확실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그 근성 또는 투지를 바라보는 황현산 선생의 시선이 액면 그대로 ‘악마’적이라는 평가를 담고 있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이 문제의 스펙트럼을 흔들어가며 조금 더 큰 맥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현대 프랑스적 사유의 대표 가운데 하나인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심각하게 맞닥뜨린 것은 그 집요한 천착穿鑿, 천착주의라고 할만한, 아니 천착증이라 해야 할 지나친 후벼 파기와 뒤집기였습니다. 도저함 너머 철저함, 철저함 너머 허망함으로까지 질주하는 ‘근성과 투지’가 저 같은 범박한 독자에게는 휴먼스케일human scale을 가뭇없이 벗어난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는 휴먼스킬human skill로 구체화될 수 없습니다. 정말 그랬는가 알지 못하지만 이런 정도라면 자크 라캉은 자신의 사유로써 정신장애 환자를 실제로 치료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 ‘근성과 투지’는 임상적 관심을 사소한 것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디에 앙지외 이야기를 해보면 이 추정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피부자아』를 번역한 사람이 권두에 쓴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후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인 위게트 뒤플로가 자신을 박해한다는 망상에 시달린 끝에 그녀를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피해망상증 진단을 받고는 파리 생트-안느(Saint-Anne)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그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을 만난다. 자크 라캉과 디디에 앙지외, 정신분석학의 두 거목 사이의 기묘한 인연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라캉은 그녀를 치료하기보다 그녀의 사례를 자기 논문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녀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데 골몰했고, 그 결과 앙지외의 어머니에게 갈등과 적대감만을 남긴 채 1년간의 치료를 마치게 된다. 라캉이 ‘에메(Aimée)사례’로 이름붙인 이 사례는 그의 유명한 박사학위 논문인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편집증적 정신증에 관하여」(1932)의 기초가 된다.


·······앙지외는, 1949년에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파리정신분석협회(Société Psychanalytique de Paris(SPP))에 소속되어 라캉의 분석 수련생이 된다. 라캉과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모른 채 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되기 전부터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에 깊은 불만을 품었고, 라캉은 앙지외에게 자기와의 분석에서 일어난 일들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불편했던 4년간의 분석을 마치게 된다. 앙지외는 라캉과의 분석이 끝나고 나서야 자기 어머니가 라캉의 환자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리고·······반 라캉 운동에 몸담게 된다. 비록 앙지외의 반 라캉 운동은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적, 임상적 견해의 차이로 비롯된 것이지만 둘 사이의 이런 악연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느냐는·······말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앙지외는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과는 달리, 분석 받는 사람들 각각의 독특한 필요에 따라 해석의 기법과 분석 기법들을 변형하는, 실용적인 영미권의 정신분석이론들을 프랑스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앙지외는 심각한 내적 상처들로 고통 받는 그의 내담자들을 감싸주고, 공감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탁월한 정신분석가였고, 임상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중대한 이론적 공헌을 남긴 사상가였다.·······그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대신한 아버지와의 친밀하고도 따뜻한 관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그의 개인적인 아픔을 승화시켜, 보다 환자의 입장에서 치료하는 적극적인 정신 분석가가 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앙지외가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피부자아 형성의 중요성을 본인 스스로 실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11-13쪽, 밑줄은 인용자 강조)


삶의 단순한 삽화가 아닌 중대한 서사로 얽혀들어 있는 자크 라캉의 핵심적 면모와 대비되면서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 글입니다. 디디에 앙지외의 삶의 맥락은 ‘실용’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그 실용의 흐름은 ‘구조주의, 언어학, 철학 등의 영역을 정신분석에 도입한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것입니다. 라캉주의 흐름을 반대한 이유는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은 휴먼스케일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까닭이 바로 자크 라캉의 천착증에 있습니다. 천착증은 프랑스 사유의 ‘중심의식’이 빚어낸 집착이며 강박입니다. 이 집착과 강박은 타인을 향한 공격과 지배로 번져갑니다. 자크 라캉이 디디에 앙지외와 그 어머니에게 그랬듯.


휴먼스케일을 벗어난 사유, 천착증을 불교적으로 번역하면 아라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극단이 주는 쾌락에 늘 머물러 있는 것을 지복으로 삼습니다. 그들은 중생의 고통에 관심이 없습니다. 있다 해도 구제의 실천을 하지 못합니다. 휴먼스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크 라캉이 그랬듯. 소승적 깨달음의 극단을 내려놓고 회향을 단행, 그러니까 휴먼스케일로 복귀하는 것이 보살입니다. 보살의 길은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한 대승적 되 깨달음의 길입니다. 대승적 되 깨달음이 바로 붓다입니다. 붓다는 휴먼스킬을 지니고 있습니다. 디디에 앙지외가 그랬듯.


붓다의 길이 허사의 길입니다. 허사의 길은 나-중심을 끊임없이 버리면서 남-경계, 주변, 가장자리로 나아가 진정한 경청,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지도록 합니다. 허사의 길은 유력하고, 구성적이고, 가시적이고, 비범하고, 중요한 것들 중심으로 사고하는 패권주의를 거부합니다. 허사의 길은 무력하고, 무위적이고, 비가시적이고, 평범하고, 하찮은 것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치유의식’을 지닙니다. 치유의식은 “어떤 근성, 밑바닥까지 내려가 뿌리를 파려는 그 투지”, 그 아라한의 천착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천착에 머무르는 아라한이야말로 ‘악마’의 실재입니다. 살해 국가의 중심, 그 실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단히 구원 공동체가 살아 숨 쉬는 변방, 그 허사를 일으키는 보살의 치유의식은 지금 슬픔과 고통의 땅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팽목항에. 동거차도에. 안산에. 광화문에. 밀양에. 강정에. 그리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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