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말의 어휘 가운데 유난히 발달돼 있는 것은 형용사입니다. 가령 빨갛다, 붉다, 불그스레하다, 같이 적색을 표현하는 어휘만 무려 16가지에 이릅니다. 영어 어휘가 두세 가지인 점과 비교하면 큰 차이지요. 이런 특성은 우리가 개념화와 분류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입니다. 개념과 분류를 통해 생각을 틀 속에 가두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더군다나 우리말의 형용사는 인도-유럽어 계통과 달리 명사에 가까운 말이 아니고 동사에 가까운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형용사가 발달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고의 역동성을 뒷받침해줍니다. 현실 세계의 흔들림과 떨림을 가감 없이 느끼려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세계를 불변하는 법칙으로 묶어서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변화 그 자체의 결을 따라 직접적으로 읽어낸다는 뜻입니다.

  ·······사람도, 병도 모두 다릅니다. 사연도, 병정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각각 맞는 치료의 도정이 있습니다. 치료자가 자신의 개념적 지식의 틀에다 환자를 우겨넣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고 아픈 이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경청함으로써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됩니다. ‘불그스름한’ 사연과 ‘불그죽죽한’ 사연의 차이를 섬세하게 느낄 줄 알아야 마음을 만질 수 있습니다.(190-191쪽)


어제 낮, 점심 식사 끝내고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으나 나른함 때문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일어섰습니다. 접수실로 나가 잠시 TV에 눈길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립던 얼굴 하나가 환한 미소와 함께 홀연히 나타났습니다. 한 동안 소식이 없었기에 더욱 반가웠습니다. 그는 제법 오래 전 결혼에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 아파하던 세월 동안 제가 그 옆에 앉아 있어주었습니다. 예고 없이 나타나더니 다시 불쑥 무엇을 내밀었습니다. 청첩장이었습니다. 대견하다며 안아주니 행복한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아픈 세월에 대한 마지막 위로를 전하자 깊은 사랑을 경험했던 시간이었다며 오히려 감사로 되 건네주었습니다. 임신 돕는 한약 한 제를 결혼 선물로 약속했습니다. 고마움으로 받고 돌아서는 마흔네 살 싱그러운 처녀를 보내며 모처럼 따스한 마음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제 눈에 비친 그 마흔네 살의 여인은 누구보다도 싱그러운 처녀였습니다. 제가 그에게서 싱그러움을 읽어내는 데에는 어떤 “개념화와 분류”로도 포착할 수 없었던 그의 지난 삶에 대한 증인의 눈길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준비가 끝나 예식만 올리면 되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파혼을 당했습니다. 그 결혼예식의 주례를 맡기로 했던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주례를 맡긴 결혼 상대방은 제 후배였습니다. 호되게 야단을 쳤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후배는 그 뒤 결국 저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저는 후배가 버린 그를 보살피고 치유하는 희한한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후배는 몹쓸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그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마흔넷의 싱그러움에 갖추는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병도 모두 다릅니다. 사연도, 병정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각각 맞는 치료의 도정이 있습니다.” 지천명도 지난 치료자였으나 상담 초기 저 또한 “현실 세계의 흔들림과 떨림을 가감 없이 느끼”지 못한 채, 제 지식의 체계 안에 사람과 병을 가두려 했습니다. 충격적 실패를 경험하고서야 제 틀을 깨고 사람과 병의 적나라한 진실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과 병 “그 자체의 결을 따라 직접적으로 읽어낸다는” 것의 요체를 깨닫고부터는 상담의 계획을 아예 짜지 않았습니다. 그때그때 상담의 현장에서 사람과 질병의 움직이는 진실 속에서 함께 방향을 잡고, 내용을 펼쳐갔습니다. 지금은 상당한 정도 일심-화쟁-무애의 흐름에서 노닐 수 있습니다. 상담이 사적 행복과 공적 참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수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형용사적 감수성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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