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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개념적으로 그어 놓은 분류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잡한 비정형 우울증은 여성에게 훨씬 더 많이 나타납니다. 아니 어쩌면 현실에서 남성 중심 분류 틀에 딱 들어맞는 여성우울증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남성의학은 특유의 구획하기compartmentalization를 포기하지 않으므로 공존 병리나 미未분류형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의 치료는 시행착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158쪽)
여성우울증은·······훨씬 더 신중하고 다각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불안장애, 공황장애, 강박장애, 전환장애, 편집장애 등 다양한 공존 병리 여부를 관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전형적인 우울증으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 즉 병명으로 규정해 내기 힘들 때 삶의 흐름을 관통하는 마음의 고통을 직관하기 위해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복잡한 생명 현상과 삶의 과정을 지닌 여성에게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입니다.(165쪽)
영혼의 땅이 말라 금가고 있다는 자각은 제법 오래 전부터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깊은 피로감에는 여러 요인이 다양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제 삶은 경륜이 쌓여 안정적인 노년으로 연착륙하는 여느 사람의 인생 단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50대 초반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거대한 폭력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어렵게 한 재기 역시 다른 형태의 거대한 폭력 때문에 빈사 상태에 놓였습니다. 물론 그 10년은 붕괴의 힘에 맞서 싸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깨달음과 사람, 그리고 글들이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전선 자체에 드리워진 집요한 소진의 그림자는 참으로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7일가량의 휴식을 주기로 했습니다. 3일 이상 넋 놓고 쉬어본 적이 없었던 세월과 일을 뒤로 하고 저는 훌쩍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거기 그 시간 속에서 펼쳐질 제 삶은 기왕 지녔던 구획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문명과 자연 풍경, 무엇보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예측 불가능한 조우는 복잡하고 다기한 흐름들을 일으킬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내맡기는 것이야말로 능동적 휴식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영혼에 빼꼼히 틈을 내었던 것이었습니다. 구획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조건에서 구획하기를 멈추고 시공간에 스며드는 경험이 주는 경이로움은 미상불 말라 금간 제 영혼의 땅을 촉촉이 적셔줄 것이었습니다.
수만 리 밖 세상은 250여 종족이 300여 언어로써 빚어가는 거대한 복잡계의 한가운데였습니다. 수많은 신들을 섬기는 수많은 신전이 도처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카스트 유제 아래 주민 열 중 아홉은 수드라 계급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1년 배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여행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자에게 길을 일부러 잘못 알려주어 스쿠터로 실어 나르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부드러운 미소에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질서와 보이지 않는 무질서, 보이지 않는 질서와 보이는 무질서가 어지러이 교차하는 가운데 수억의 사람들이 밀림을 가로지르며 삶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 구획에 포획되지 않듯 저 또한 그들의 구획에 포획되지 않으며 흘러갈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들 사이에 잠시 머물며 그들과 오래 공유할 수 있는 밤하늘 별자리를 사무치게 올려다보았습니다.
돌아와 다시 진료실에 앉았습니다. 우울증에 시달려온 두 사람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통의 구불구불한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고 두 점 사이 직선 긋듯 딸랑 결론만 던져주고 야단치는 치료자들에 관하여 정색하고 대화하였습니다. 뜨르르한 명성의 어떤 강의자들이 설파하는 부분적 몰입이 어떻게 전체적 주의와 다른지 가차없이 추궁했습니다. 저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남성가부장성입니다. 강의든 즉문즉설이든 상담이든 심지어 치유든 저들의 행위는 구획하기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도리어 권위를 갖춘 폭력입니다.
남성가부장이 말과 글, 그리고 약으로 일으킨 수탈의 토건은 영혼과 돈을 함께 가져갑니다. 우울증에 긍정과 감사를 주입해 조증으로 바꾸는 일을 저들은 치료라고 합니다. 조증증후군 사회에서는 연예인이 힐러가 되고, 요리사가 스승이 됩니다. 이들은 예능과 음식을 향락으로 떨어뜨립니다. 향락은 허무를 흩뿌리며 우울증을 심화·증폭시킵니다. 이런 광기의 세상에서 놓여나려면 고통의 과정을 공유하여 삶의 전체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비중심성 연대를 빚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비대칭적 대칭성의 회복입니다. 여성성/모성성의 복원입니다. 반가부장 혁명입니다. 평등한 소통입니다. 공감의 파동이 번져가는 광활함입니다. 7일의 비움이 제게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알 수 없습니다. 고요 가운데 그 결을 감지하면서 같은 해가 달리 보이는 순간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