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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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성) 회복 문제, 그 고갱이로서 여성우울증 문제가 우리 시대의 긴절한 현안으로 떠오르는 까닭에는 한 번 더 접힌 논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성이 모든 인간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여성(성) 문제가 모성(성) 문제로 진화하는 지점이지요. 여성의 생명 자체와 그 생명 감각이 가장 치명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여성이 잉태하고, 낳고, 키워내야 하는 미성숙기 생명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미래와 현재를 한꺼번에 쥐고 흔드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무엇보다 관건은 이들의 정신건강 여하입니다. 최근 들어 다양한 스펙트럼의 발달장애는 물론이고 어린이우울증, 청소년우울증 등이 그려내는 가파른 상승곡선은 깊은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청소년우울증 문제는 매우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아이들이·······더 힘들어하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호소할 때 어른, 특히 어머니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뭐, 우울증?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게, 무슨…. 공부나 열심히 해!”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절망감이 아이들을 더욱 큰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제 때, 제대로 치료를 받아도 어려울 텐데 이렇게 마음의 고통 자체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지게 마련입니다. 어른들한테서 자신의 고통 자체를 부정당한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의사를 찾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상황에 있을 때 아이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좌절감이 문제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아이들은 자신을 놓아버립니다. 게임을 비롯한 중독이 아이들을 급습하는 게 바로 그 시점입니다. 이런 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의 중독만을 욕합니다. 중독은 일탈이기에 앞서 포기이고 절망입니다.·······

  이 문제를 대할 때 다만 입시제도 따위를 원인으로 지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생명말살적인 남성가부장적 자본주의 문명 전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해결됩니다. 그 주의가 다름 아닌 여성(성), 더 분명하게 모성(성)의 복원이란 화두 들기입니다. 문명의 주체인 우리, 어른, 특히 어머니로서 여성 자신이, 병에서, 죽음에서, 깨어 일어나 아이들의 아픈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여성이 남성문명의 헤게모니에 매몰되어 스스로 여성(성)과 모성(성)을 놓치고 있는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여성이, 엄마가 우울증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어찌 아이들의 현실에 제대로 귀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엄마들은 자신이 피해자이자 가해자란 사실을 불에 덴 듯 각성해야 합니다. 지금 아이들이 우울증으로 죽어갑니다, 엄마를 살려주세요!(138-141쪽)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1위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으면서 아무도 진지하게 입대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고등학생 250명이 한꺼번에 침몰하는 배에 갇힌 채 죽어가는 광경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았으면서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하자며 입 다무는 우리가 오늘 대한민국 시민입니다. 자살이라 표현하지만 사회적인 타살이 분명합니다. 사고라고 우기지만 국가가 고의로 일으킨 사건이 맞습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침묵하는 것입니다. 추악하고 비겁한 카르텔입니다. 어른들은 이렇게 아이들을 죽여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맨 앞줄에 엄마들이 서 있습니다. 엄마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엄마들의 무지는 사회가, 국가가 만들어낸 어둠의 일부입니다. 사회국가적 어둠 속에서 제 새끼들을 죽일 때 엄마들은 스스로를 또한 죽이고 있습니다. 엄마들의 자살 역시 사회국가적 타살임은 물론입니다. 엄마들을 살려야 합니다. “엄마가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허름해 보이는, 심지어 우스워 보이는 이 말 한 마디가 정녕코 수천만의 생사를 가릅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있는 두 딸을 둔 중년 여성이 있습니다. 그는 상담 중에 자기가 딸들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몹시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심한 죄책감을 여러 차례 호소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볼 때 상처 입힌 엄마의 마음으로만 보지 말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마음으로도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음 주에 그가 와서 조언대로 했더니 아이들에게서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여전히 죄책감이 심했느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가 뽀얗게 웃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습니다. 죄책감은 대부분 진정한 성찰에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근거 없이 들어와 굳어진 기준으로 가한 비판에 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은 아이들 속에서 상처 입은 자신을 발견하자 그는 두 번째 큰 눈물을 쏟아내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어렸을 때처럼 재워달라기에 자장가를 부르고 다독거려주었습니다. 다음 순간 둘째 아이가 그 조그만 손으로 제 등을 다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목하 그 아이들은 서로 다독거리면서 함께 치유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의 친정어머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형적인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어머니였습니다. 자애로운 모성 어법의 행간에 폭력과 억압이 쏴아 소리를 내며 흘러갔습니다. 어머니는 그 짧은 시간에도 반복해서 돈과 체면 중심의 가부장 윤리를 설파하며 딸의 병을 인정하고 좋은 치료를 의뢰한다기보다 잘못을 교정해주기를 당부하는 속내를 드러내 보였습니다. 돈 걱정 때문에 치료 안 받겠다 하거든 연락 달라며 전화번호를 불러준 뒤, 재삼재사 부탁하는 말을 끝으로 어머니는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가 제게 온 곡절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통화였습니다. 통화를 끝낸 다음 한참 동안 그 음성과 말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문장들로 이어져 있지만 우리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무르녹아 있어 거대한 어둠과 절망을 가득 품은 말들이었습니다. 거꾸로, 이런 말들은 불의한 권력과 사악한 자본을 키워내 온 찰진 자양분이기도 했습니다. 문제가 깊을수록 각성은 멀어지고 중독의 유혹이 밀착해오는 현실 앞에서 무명의 의자는 그저 율연해질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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