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감성적 직관·······

  남성과 여성이 대립할 때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는 까닭은 여성은 공감을 요구하고, 남성은 수긍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감성의 문제이고, 수긍은 이성의 문제입니다. 여성들끼리 수다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은 공감에 터 잡은 맞장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들끼리 계약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은 수긍에 터 잡은 맞바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은 말의 내용이 지니는 울림에 대한 직관적 반응입니다. 수긍은 말의 내용이 지니는 타당성에 대한 이지적 반응입니다.······

  ·······감성적 직관으로 사람과 삶, 그리고 병을 느끼는 것은·······이성으로 판단하고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이성은 보는 감각이고, 직관은 듣는 감각입니다.·······들음으로 시작하는 의학은 겸손합니다. 환자와 따스한 공감, 평등한 소통, 나아가 일치와 통섭을 지향합니다. 눈물이 있고 환희가 있는 세계를 꿈꿉니다. 보고 판단하는 의학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이상입니다.

  이성적 판단은 분석과 평가라는 개념의 매개가 필요합니다. 이 개념의 매개 때문에 이성은 생명의 본령에 더듬거리며 접근해야 합니다. 쓱쓱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거침없이 다가가지 못합니다. 결국 절대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절대고수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소외되는 법이 없습니다.(132-133쪽)


20대 중반의 청년 하나가 제법 오랜 기간 상담하러 옵니다. 물론 초기 몇 달을 제외하고는 오다 말기를 반복하며 시난고난 흘러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병적 이성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삶의 모든 부분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올 때마다 쏟아내는 폭포수 같은 말들은 거의 모두 자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래서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가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러는 한편 괴로움에 빠진 자기 자신을 무조건 받아들여줄 사람을 찾습니다. 정작 받아들여지면 거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끊임없이 떠도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물론 그는 의사인 제 진단과 처방조차 깊이 공감하지 못합니다. 병적 이성에 갉아 먹혀 파리해진 이성으로 겨우 수긍만하다가 속절없이 놓치고 맙니다. 훈습의 가능성이 닿지 않는 긴 시간을 헤매다가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오기를 거듭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는 ‘부모자아’가 내면화한 허구적 이성에 제압되어 자기 자신을 분석·비판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아픕니다.


흔히 말합니다.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로 고통을 이겨낸다고. 그러나 그렇게 이겨내진 고통은 사실 별 것 아닙니다. 그 정도에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알량한 승자의 허세입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작동할 수 없는 엄혹한 정서적 통증으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여전히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입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모두 무력하게 만드는 정서적 통증이라는 것이 과연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냉철한 이성도 불굴의 의지도 모두 무력하게 만드는 암은 인정하면서 어찌 그런 우울증은 인정하지 않는가? 정서의 통증이 몸의 통증에 비해 그렇게 하찮은 것인가? 그렇다면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힘인가? 저 통속한 승자의 허구적 논리는 정서나 감성에 대한 무지와 무시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정서나 감성에 대한 독자적인 쓰임새를 정해두고 있습니다. 정서는 질병, 그러니까 고통으로 열려진 감정의 가능태를 말하며 감성은 건강, 그러니까 소통으로 열려진 감정의 가능태입니다. 둘의 실재가 달라서 그리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비대칭의 대칭으로 나타나는 사건을 언어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한 방편입니다. 하여 제 경우 감성적 통증이나 고통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서적 직관이나 공감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습니다. 여기서 두 말의 공통 기반인 중용적 감정이라는 말을 이성과 의지에 마주 세워서 그것의 정체를 밝혀보겠습니다.


감정은 몸에서 일어난 최초의 마음 사건입니다. 반대로 마음에서 일어난 최초의 몸 사건입니다. 감정은 몸이자 마음입니다. 감정은 몸만도 아니고 마음만도 아닙니다. 변방의 마음입니다. 변방의 몸입니다. 마음 가운데 가장 단단하고 셉니다. 몸 가운데 가장 말랑말랑하고 여립니다. 감정을 거치지 않고 몸이 마음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감정을 거치지 않고 마음이 몸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런 진실을 놓칠 때 질병이 생깁니다. 감정의 상처가 상처의 본질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도 의지도 상처 받지 않습니다. 이성과 의지가 흔들릴 때 상처받는 것은 이성과 의지 자체가 아니라 바로 감정입니다. 그 방향의 감정을 정서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이 진실을 놓칠 때 치유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감정의 치유가 치유의 본질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성도 의지도 치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성과 의지가 흔들릴 때 치유해야 하는 것은 이성과 의지 자체가 아니라 바로 감정입니다. 그 방향의 감정을 감성이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정서의 통증이나 고통을 치유하려 할 때 요청되는 것은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가 아닙니다. 감성적 직관이나 공감입니다. 감성적 직관이나 공감으로 정서의 통증이나 고통이 치유되면 이성과 의지가 정상 작동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닙니다. 인간 생명이 자라온 역사의 과정이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인간 생명이 지니는 에너지의 역학관계 또한 그렇다고 말해줍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정에서 넘어진 자, 감정을 짚고 일어섭니다. 정서적 통증으로 넘어진 자, 감성적 직관, 그러니까 공감을 짚고 일어섭니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치료합니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합니다. 바로 이것이 동종의학입니다. 아니 공현의학입니다.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치료되지 않는 위중한 질병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울증은 바야흐로 우리에게 최후의 불치병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하루에 40명씩 자살하는 나라입니다. 냉철한 이성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에 눈멀어 있는 나라입니다. 이 대한민국에서 우울증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대, 넘어져서 아픈, 똑같아서 서러운, 예은이 이름만 떠올려도 왈칵 눈물 나는 사람입니다. 감성적 직관으로 일어섭니다. 공감으로 나아갑니다. 기대 없는 설렘으로 함께 갑니다. 그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