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역동적 흐름·······

  남성이 주목하는 입자는 불변하는 공간구조물입니다. 몸은 물론 마음도, 병도 그런 공간구조물입니다. 그러나 여성은 딱딱한 공간구조보다 율동과 변화를 통해 생명과 병을 느끼고 포착합니다.·······

  변화하는 흐름으로서 삶과 병은 아무리 정교하게 포착해도 건축학적 구획과 궤도를 넘나들게 마련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이탈과 역류, 혼합과 분지, 비약과 몰락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성의 생명 현상, 특히 마음이 남성이 만든 구획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경계를 가로지르거나 공존 병리 현상이 복잡하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울증에서 여성은 정형성을 벗어난 우울증일 경우가 많습니다. 남성 위주의 정형에 맞춘 치료가 전혀 유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황이 흔들릴 때 남성은 불변하는 구조와 구획, 패턴으로 그것을 제압하려 하지만 여성은 다양한 변화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변화의 결을 감지합니다. 변화 속에서 변화에 유념하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 개념에 사실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격자 틀을 가지고 사람과 삶과 병을 읽지 않습니다. 사람도, 병도 어디선가 와서 어디론가 갈 도상의 존재라는 사실에 깊이 주의합니다. 그 역동적 과정에 동참함으로써 유익한 간섭파를 일으킬 길을 모색합니다.(126-128쪽)


가투街鬪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일상어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 나라 민주화운동에 일말의 기억만이라도 있는 사람한테라면 ‘가투’가 소환해내는 풍경, 냄새, 소리란 가뭇없이 사라졌다가도 문득 들이닥치는 플래시백 같은 무엇일 터입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지나치게 일찍 상처로 감지했기 때문에 저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증득證得이 더뎠습니다. 서른 즈음에야 가까스로 대한민국의 실상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깨달음으로 주춤주춤 현실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치열한 가투 현장에 홀로 설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를 전혀 공유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백골단’에 쫓기거나 잡히는 상황에서 겪는 보호받지 못하는 자의 공포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두려움을 견뎌내기 위해 제가 생각해낸 유일한 방법이 검정색 정장과 넥타이였습니다. 실제로 막다른 골목에서 홀로 여러 명과 대치한 적이 있었는데, ‘백골단’도 검정색 정장을 입고 검정색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신사(?)를 차마 때리거나 잡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조직을 만들고 구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홀로이거나 여럿이어도 조직·구조가 아닌 경우는 불안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원시사회의 소박한 것에서 현대사회의 고도한 것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는 조직·구조의 진화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진화 과정에서 조직·구조의 헤게모니를 남성이 독점해왔음은 물론입니다. 남성 헤게모니블록은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는 물론 자연까지도 조직·구조의 틀로 통제했습니다. 분석적·기계적 방식으로 안정되게 관리·수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학도 일찌감치 여기에 복속되었습니다. 이치로 따지면 인간이 만들어낸 조직·구조는 인간의 몸을 모방 또는 대유代喩한 것입니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관계는 뒤집혀 도리어 몸을 문명적 조직·구조의 관점에서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질병 자체에 대한 이해는 물론 진단과 치료도 당연히 그렇게 역전되었습니다. 주류 서구의학이 몸을 기계구조로 보고 치료를 고장난 기계 고치듯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전가의 보도가 다름 아닌 수술입니다. 수술은 몸 조직·구조에 일으키는 토건사업입니다. 토건은 남성적 착취의 전형입니다. 남성의 토건의학은 정신질환에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저들에 따르면 정신이라는 것도 결국 뇌 조직·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 현상은 조직·구조의 안정성 이상의 것입니다. 조직·구조는 바로 그 이상의 것에 이바지하기 위한 인프라일 뿐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역동적 흐름을 통해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 경이로운 창조입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은 바로 이 변화와 창조가 뿜어내는 빛입니다. 인간 생명에게 일으킨 남성적 토건의학의 ‘4대강사업’은 ‘녹조’와 ‘큰빗이끼벌레’ 같은 독성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보’를 터야 합니다. ‘강물’을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흘러야 삽니다. 살아야 생명입니다.


복잡하게 뒤엉킨 정신장애를 지닌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 이야기를 자꾸 조직하고 구축합니다. 그 속에 들어앉아 타인을 조종하려 합니다. 한사코 같은 증상을 거듭 말하면서 무조건적으로 받아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과 변함없는 동맹 조직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오늘도 지치지 않고 말해줍니다. 


“안전한 성을 쌓는 치료란 없습니다. 치료는 변해가는 것입니다. 변화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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