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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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속성·······

  마음과 몸은 물론 나와 너를 포함한 모든 이것과 저것의 나눔에 여성은 남성처럼 단세포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 가운데 완전히 같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완전히 다른 존재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현실을 어떤 감각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남성은 같은 데서도 다른 것을 보는 데 익숙하고, 여성은 다른 데서도 같은 것을 보는 데 익숙합니다. 남성은 겹치지 않는 것에, 여성은 겹치는 것에 주의합니다.·······

 인간관계·······맥락으로·······보면 남성은 ‘홀로주체성’에 터를 잡습니다. 홀로주체에게 상대방은 객체고, 객체는 대상이고, 대상은 사물입니다. 사물은 주체 아래에 섭니다. 수직적인 다름에 주목하는 이원론입니다. 여성은 ‘서로주체성’에 터를 잡습니다. 서로주체에게 각각의 상대방은 자신과 평등한 주체입니다. 수평적인 같음에 주의하는 이원적 일원론, 즉 ‘따로 또 같이’라는 생각입니다.

  서로주체는 마주 선 주체의 말을 듣는 것으로 소통을 시작합니다. 먼저 제 말부터 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제 눈으로 본 것을 중심에 놓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듣기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상호연속성에서 시작한다는 뜻이고, 말하기부터, 본 것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상호단절성에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질문한다는 뜻이고, 질문한다는 것은 선입견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련의 반이원론적인 여성의 감각은 의학적 사유와 실천에서 뚜렷하게 차이를 드러냅니다.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생각합니다. 몸의 병에서도 마음의 변화를, 마음의 병에서도 몸의 병화를 읽어냅니다. 환자를 사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아픔에 공감하고 인격과 삶을 공유하려 애씁니다. 대등한 주체로 느끼고 인식합니다. 자신을 치료자의 높은 위치에 자리 매기지 않습니다. 척 보면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질문합니다. 경청하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진단도, 치료도 함께 이루어 가는 삶의 과정임을 인정합니다. 병도, 치료도, 사람도 모두 연속성 안에 있다는 사실에 늘 주의합니다.(124-126쪽)


쇠귀 선생의 『담론』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닛타 지로新田次郞의 『알래스카 이야기』에서 읽은 눈썰매 이야기입니다. 알래스카에서는 눈썰매를 끄는 여러 마리 개 중에서 가장 병약한 개의 줄을 짧게 맨다고 합니다. 개들이 빨리 달리게 할 때에는 짧게 매여 있는 개를 채찍으로 때립니다. 그 병약한 개의 비명이 다른 개들을 더욱 빨리 달리게 합니다. 그 병약한 개가 죽고 나면 나머지 개 중에서 가장 병약한 개가 그 자리에 묶입니다. 혹시라도 자기가 썰매를 끄는 위치에 있다면 엄벌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엄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썰매를 끄는 사람이 아니라 썰매를 모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엄벌이란 병약한 개를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히 연구되어 있습니다. 엄벌과 공포는 사회를 경직시킵니다. 반대로 참여와 소통은 많은 사람들의 잠재력을 고양하고 사회 역량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와 소통 구조는 자칫 썰매 위의 자리가 침범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그리고 사회란 원래 썰매의 위아래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약한 개를 채찍으로 때려왔습니다. 법과 정의, 그리고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습니다. 그 것이 바로 강자의 위선입니다.”(268-269쪽)


여기서 오늘 우리사회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병약한 개 때려 죽게 만드는 썰매 모는 사람과 세월호사건 일으킨 사람을 포개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또 누구일까요? 대한민국은 목하 엄벌과 공포로 경직되어 있습니다.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잠재적 긴급조치가 내려져 있습니다. 참여와 소통은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있습니다.


엄벌과 공포는 불연속성의 정치학입니다. 불연속성의 정치학은 남성의 논리입니다. 참여와 소통은 연속성의 정치학입니다. 연속성의 정치학은 여성의 논리입니다. 여성이 권력의 정점에 서던 대한민국의 바로 그날 장밋빛 환상을 그려내던 자들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들의 환상은 저들에게만 찬란한 현실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1%에게만 연속성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99%에게는 불연속성이 여리고성처럼 둘러져 있습니다. 99%에 속한 사람들은 약한 순서대로 시시각각 채찍에 맞아 개처럼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의 비명을 듣는 나머지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죽자 살자 달리고만 있습니다. 육신에 앞서 정신이 이미 죽었다는 진실조차 모른 채 강시질주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우리 공동체가 소멸하지 않으려면 연속성의 지평을 되찾아 99%에게 열어주어야 합니다. 거기서 참여와 소통이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누가 합니까? 가녘(변방)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깨달아(통찰) 자신을 바꾸고(변혁), 그 바꿈을 타인에게로 번져가게(연대) 함으로써 공동체를 되살려냅니다. 지금 어디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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