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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우울증, 윤리적 문제가 아닙니다
·······우울증은 명백한 질환입니다. 윤리적으로 훈계하여 그 잘못을 교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상담한 모든 우울증 환우에게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저와 나눈 이야기를 모두 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는 반드시 가슴에 품으셔야 합니다. 윤리는 내려놓고 생명을 들어라!”
·······우리 사회는 오래토록 가부장적 유교문명을 유지하는 동안 윤리강박증에 빠져버렸습니다. 모든 문제를 윤리적으로 환원하여 생각하는 인습에 젖어버렸습니다.·······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우울증은 윤리적으로 다그칠 일이 결코 아닙니다.(92-93쪽)
저 옛날 사대부들이 앞으로는 강상綱常의 도를 설하고 뒤로는 축첩과 기생놀음에 빠져 지냈던 것처럼 오늘의 권력도 온갖 음란과 협잡을 밀실에 숨긴 채 입만 열면 단호한 윤리를 전유합니다. 윤리를 강조할수록 패륜이 무성한 공공연한 스캔들을 오늘의 권력은 더 이상 거추장스럽게 여기지 않는 듯합니다. 자신만만한 것인지 윤리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놓고 방자한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권력의 정상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대로 저변을 물들입니다. 물든 남성의 손길을 따라 가정으로도 파고듭니다. 성 접대 받고 이권에 개입하는 공무원 아버지가 그 딸의 우울증을 윤리적 훈계로 억압하려 듭니다. 윤리적 잣대를 거꾸로 들이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그가 알 리 없습니다. 그가 대한민국 아버지의 전형임을 누가 부인할 것입니까. 지금 이 시각에도 그런 아버지의 딸들이 우울증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윤리를 붙잡는 것은 종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음성 되먹임 구조가 작동하지 못하는 진화적 과잉, 이를테면 그 실패를 보전補塡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 뿐입니다. 윤리가 지극히 겸허한 당위이며 간절한 요청이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마저도 낡아빠진 유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윤리는 더 이상 탐욕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도리어 탐욕의 앞잡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울증을 윤리로 억압하면 대체 무슨 이득을 취할 수 있을까요? 상식적으로 보면 의학적 치료를 저지함으로써 개인적·사회적 비용 절감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울증을 윤리적 문제로 치부하면 인간 자체를 통제·착취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자 있는 인간으로 낙인찍어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처럼 쉬운 통치술은 다시없습니다. 노예화, 바로 그것입니다.
WHO는 2020년 선진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질병 제1위, 개도국 이하의 경우 제2위로 우울증을 꼽았습니다. 지금 의료상황이 계속되는 한, 우울증 앓는 사람들은 화학합성약물의 노예 아니면 윤리적 정죄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을 이런 노예로 놓아둔 채 인류가 존속한다면 존속 그 자체가 범죄일 것입니다. 우울증 인식의 일대전환이 화급한 시점입니다. 윤리는 내려놓고 생명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